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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경향 돋보기] 진정한 성인 공경이란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5.

[경향 돋보기 - 진정한 성인 공경이란]

성인의 역사와 공경의 의미

최용감 안젤로 신부

 

 

들어가며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가 맞이한 각 시대와 상황에 맞게 그 시대의 징표를 읽어 내며 하느님께서 존재하심을 온몸으로 드러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성화(聖化, 레위 11,44; 1베드 1,15)로의 초대에 기꺼이 응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을 후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모범으로 삼으며 자연스레 ‘성인 공경’(cultus sanctorum) 행위가 시작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특히 박해 시대 순교자들을 공경하였는데, 이들이 영생을 얻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되었으며 그리스도와 지상의 교회를 중개한다고 생각하였다. 이후 박해가 멎으면서 순교할 기회가 사라지지 다른 차원의 성인 공경 행위가 시작되었고 전 유럽으로 널리 퍼졌다.

 

한편 성인 공경은 지나칠 정부 광신이나 미신적인 행위로까지 치달아 교회의 우려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사실 성인 공경은 대중 신심에서 생겨났지만,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지나칠 우려가 늘 잠재하기에, 교회의 공적 전례에서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교도권의 지도가 필요했다.

 

박해 시대의 순교자 공경

 

순교는 ‘따라 죽을’ 순(殉)자에 ‘가르칠, 교회’ 교(敎)자가 합쳐서 만들어진 단어로, 풀어 보자면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의미한다. 라틴어로 순교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마르티리움(martyrium)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단어는 본래 ‘증인’ 또는 ‘증거’를 의미하지만, 교회적으로는 ‘피 흘림으로 순교자가 됨’을 의미한다. 즉, 순교란 그리스도인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성된 단계라 할 수 있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인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는 실로 초인적이라 할 수 있었고,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따라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는 인식은 그리스도교인을 넘어서 이교인들에게까지 차츰 확산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관례적으로 순교자들이 죽은 장소에서 모이기 시작하였고, 순교자들이 이미 구원의 영예에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그들의 순교일(dies natalis, 천상 탄일)을 기억하고 순교자들의 유해를 깊은 신심으로 보관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313년)은 교회의 운명뿐 아니라 그 모습도 변화시켰다. 그때까지 박해를 받던 교회는 로마제국의 인정을 받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신생 그리스도교를 통일된 로마제국의 내적 구심점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황제의 의도에 따라 다른 종교들보다 다소 우월한 대우를 받다 보니, 제국 통치의 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 위험에도 노출되었다.

 

박해가 끝난 뒤 신자들의 관심은 순교자가 아닌 다른 차원의 성인들, 곧 비록 신앙을 위해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앙을 옹호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삶으로 옮겨갔다. 비록 순교는 하지 않았으나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고백자(confessor), 안토니오 아빠스처럼 세상과 떨어져 사막과 광야 같은 곳에서 수행하던 고행자(asceticus)나 은수자(anachoreta),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노처럼 이단에 맞서 가톨릭 신앙을 지켜낸 주교와 교부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동시에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 세계는 이방 민족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교회 또한 이리한 혼란의 국면에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하느님의 섭리는 지속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럽 대륙이 아닌 현재의 영국과 아일랜드 지역에서 시작된 지역민과 함께하는 골룸바노 수도 생활과 체계적인 수도 규칙을 가졌던 베네딕토 수도 생활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기고, 수도승(monachus)들을 공경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지나친 성인 공경의 문제점과 교도권의 개입

 

성인 공경이 교회 생활 속에 불러올 유익함은 분명하였지만, 공경이 지나칠 경우 광신 또는 미신으로까지 기울 우려 또한 있었다. 초기 박해 시대 엄격한 생활을 추구하던 집단들은 때때로 순교를 하도록 강요한 경우도 있었기에, 주교들은 그러한 지나침에 대해 경고하기도 하였다.

 

치프리아노(Cyprianus, ?-258년) 주교는 스스로 순교를 원하여 찾아다니는 것은 지나친 자만이라고 경고하였다(「죽음」, 17장). 또한 그리스도교 교리가 정립되기 이전 시대인 초대교회 때는 다양한 이단이 존재했는데(영지주의), 이들은 순교의 영웅적인 면모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선을 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클레멘스는 ‘선교를 위해서 어떤 순교도 피해야만 한다. 신앙을 전파하는 기회를 더 가지고자 겉으로 패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라고 말하며 자만심에 기인한 순교를 경계하기도 하였다.

 

박해 시대 이후에는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유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해를 지방의 큰 성당들에 안치함으로써 신자들은 순교자의 유해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인 유해에 대한 열망은 또한 남용을 낳기도 하여, 9-11세기에는 유해의 위조, 상품화, 악용, 절도 등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는 카타리파(Cathari), 발도파(Valdesi) 등이 지나친 성인 공경을 비난하였고, 종교개혁 시대 개혁가들은 성인의 존재나 모범적인 삶은 인정하였지만, 성인들의 전구나 중재자로서의 역할은 부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오·남용을 막고자 교도권 차원에서 시복 시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시성이란 어떤 가톨릭 신자가 실제로 영광 중에 있으며, 온 교회로부터 공적으로 공경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최고 교도권이 결정적인 형태로 선언하는 행위이다. 시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부분들만 언급하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이 교황에게 유보되었고(1234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예부성성을 설립하여(1588년) 시성 대상자의 심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예부성성과 독립된 시성성을 설립하였고(1964년), 현재까지 시성성에서 시복과 시성의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

 

올바른 성인 공경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어느 날 신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데, 가사가 구구절절 너무 마음을 울려 이 글의 원문을 찾아보려 애쓴 적이 있었다. 찾아보니 음을 붙여 노래하는 부분은 시의 앞부분(1장)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예수의 데레사(대 데레사) 성녀가 쓴 8장으로 구성된 긴 시였다. 음을 흥얼거리며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어가는데 눈에 확 띄는 부분이 있어 반복해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시의 제목이었다. 단순히 가사의 제일 앞부분인 ‘아무것도 너를’을 제목으로 알고 있었는데, 성녀가 직접 붙인 이 시의 제목은 ‘인내’였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림을 느꼈다.

 

신학생 때부터 그 명성을 자주 들어 왔고 교회의 역사에 성덕으로 한 획을 그은 성녀 대 데레사! 너무 큰 인물이었고, 사실 그분의 책이나 자서전을 읽어도 그 깊이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당연한 듯 여겨 왔다. 사제이긴 하지만 세상에 한 다리를 걸치고 사는 내가 따라가기엔 너무 먼 대 데레사 성녀, 그래서 나와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존재로 여기며 살아왔고, 시에서 고백하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라는 구절을 어쩌면 ‘대 데레사이기 때문에 당연하지.’라고 치부하면서 살아온 데 대한 충격이었다. 시의 제목이 바로 ‘인내’임을 알았을 때,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대 데레사 성녀가 얼마나 많은 인내의 시간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공경을 한다 하면서도 나와는 동떨어진 존재로 인식하는 이러한 태도가 어쩌면 우상숭배, 미신적 공경은 아니었을까?

 

사실 성인 공경은 교회의 오랜 전통이자 은총의 보고이기는 하지만, 교회가 그 자체를 의무화한 적은 없다. 미사 경본의 성인 감사송은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성인 공경의 의미를 알려 준다.

 

아버지께서는 성인들 가운데서 찬미를 받으시며

그들의 공로를 갚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을 빛내시나이다.

또 성인들의 삶을 저희에게 모범으로 주시고

저희가 성인들과 하나가 되게 하시며

그 기도의 도움을 받게 하시나이다.

 

성인 공경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천상 형제들에게 표시한 공경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의 친교를 명백히 인식함이고, 그러한 순례하는 교회와 천상 교회와의 친교를 의미하는 통공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준다(교회 헌장, 50항 참조).

 

하늘의 모든 성인 성녀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주 하느님께 전구하여 주소서.

 

 


 

* 최용감 안젤로 – 광주대교구 신부로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20년 11월호]

 

 


 

 

[경향 돋보기 - 진정한 성인 공경이란]

성인 공경, 모범을 따르며 전구를 청하다

김성봉 프레드릭 신부

 

 

들어가면서

 

초남이성지 개발이 시작된 지 수십 년 동안 성지 입구에 폐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타지에 사는 주인은 절대로 팔지 않겠다고 했다. 성지에서는 꼭 필요한 땅인지라 요셉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날마다 요셉 성인 호칭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이 갑자기 땅을 팔겠다고 했고, 그 땅을 사 제대로 생가 터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남미 지역에서 선교사로 지내던 한 신부가 성지에 들렀다가 복귀한 선교지 공항에서 동료 신부에게 전해 줄 가방을 잃어버렸다. 그곳에서 분실물을 찾는 일은 무척 어려워 난감해하던 그 신부는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 그 가방을 기적적으로 찾게 되었다.

 

불가지론이나 무신론에 따르면 이는 우연일 뿐이다. 그럼 이를 믿는 우리에게 성인은 다만 우리 삶에 필요한 바를 얻어 내는 걸 돕고 중재하며 간구(intercessio)해 주는 존재일까? 아니면 살아가면서 본받고 닮아야 할 귀감이자 표양(exemplum)일까?

 

성인 공경은 우리 신앙에서 꼭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없어도 무방한 옵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성인을 공경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특히 수많은 하느님의 종과 복자의 시복 시성을 위하여 기도하는 요즘, 성인 공경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과장과 협착함을 극복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67항은 성모 공경을 다루면서 “천주 성모의 독특한 품위를 숙고하는 데에서 어느 모로든 온갖 거짓 과장이나(an omni falsa superlatione) 지나치게 협착한 마음을(a nimia mentis angustia) 애써 삼가도록” 권고하는 비오 12세의 담화를 인용하였다. 이는 성인 공경에서도 유효하다. 양극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건강한 공경이 생겨난다.

 

‘공경’의 대상인 성인을 마치 ‘흠숭’의 대상인 하느님처럼 신격화하여 인간을 숭배하거나,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무시한 채 오직 극적인 사건만을 다룰 때,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려야 할 흠숭이 소홀해질 위험이 있다. 그리고 덕행 실천과 같이 우리가 성인에게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을 간과하기 마련이다. 성인을 널리 기리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영웅적이고 덕행을 훌륭하게 실천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런 삶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함이다.

 

묵상하는 시간은 조금이고 수많은 성인성녀 관련 기도문을 바치는 데 기도 시간 대부분을 할애한다. 본인이 선호하는 특정 성인이 다른 성인보다 더 큰 도움을 준다고 믿으며 더 가까이한다. 성상과 성인 메달이 그대로 큰 효험이 있는 것인 양 애착한다. 이런 모습은 분명히 정화되어야 하며 사목자의 분별과 지도가 꼭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신자들의 성인 공경의 자세가 성숙하지 못하다고 무조건 폄하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은 아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말한다. 누군가를 도우려고 사랑과 희망과 믿음의 덕으로 성인에게 다가서는 행위는 거룩한 것에 대한 순전히 인간적인 추구의 표현이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의 마음 안에 부어진 성령의 활동으로 힘을 얻는, 하느님에 대한 삶의 표현일 수도 있다.

 

성인 공경에서 생겨날 수 있는 이런 양극을 극복하면서 건강한 성인 공경을 하려면 균형과 조화가 요구된다. 성인의 모범으로 성장하고 그들의 전구로 도움을 받는(교회법 제1186조 참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인들에게 간구와 중재를 요청하는 것에 비하여 그들의 모범과 표양을 따라 사는 것이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어 왔다.

 

성인은 하느님 대전에서 영광을 누리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는 전구자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구원으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귀감이자 모범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인들의 훌륭한 삶을 본받고 그 전구에 의탁해야 한다(성인 감사송2 참조).

 

전구자(轉求者)

 

다양한 교회 문헌을 살펴보면, 성인은 이 세상에서 앞서 살다 간 이, 우리보다 앞서 하늘나라에 들어간 증인, 이미 천상 고향에 이른 이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더 친밀히 결합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받고 함께 영광을 받았으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일에서 주님을 섬겼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사람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전구하고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을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이들이고 그들의 구원에 협력한다. 그들의 전구는 하느님 계획을 성취하려는 그들의 봉사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이기에, 자신의 나약함 안에서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인 공경은 없어도 무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말하듯, 좋은 것이고 유익한 것이다(bonum atque utile esse).

 

이러한 성인 공경에서 우리는 성인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온갖 은총과 하느님 백성의 생명 자체가 그 원천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다양한 성인 공경을 통하여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만나게 된다.

 

우리는 똑같은 인간으로서 현실의 삶을 살았기에 우리에게 자극과 위로가 되어 주는 성인을 공경함으로써 그들 안에서 보여 주신 하느님 사랑에 이끌리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흠숭과 달리 성인 공경은 성인이 훌륭한 존재이고 남다른 업적을 남겨서 그들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한 성인들 안에서 당신의 사랑과 위대하심을 드러내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기 위함이다.

 

모범 : 그리스도인 삶의 표양

 

성인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본받으며 주님께 대한 커다란 신앙심으로 성덕을 실천하며 모범적인 삶을 산 산 사람이기에 그들은 신자들에게 본받아야 할 적절한 모범을 제시하면서 교회를 성덕으로 더욱더 튼튼하게 강화한다(전례 헌장, 111항 참조).

 

우리는 성인의 이러한 참된 증언에서 성덕을 감지하고, 그들의 영성 전통과 오랜 역사에서 성덕을 확인한다. 이런 이유로 성인 공경에서 전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다 간 그들 성덕의 모범을 본받는 일이다. 그리고 신뢰하는 자세로 성인께 전구를 청하는 이는 성인과 친교가 이루어지기에 자연스럽게 그 성인을 통해 드러난 성덕에 매료되어 자신 또한 그러한 덕행 실천에 자극을 받기 마련이다.

 

우리 자신의 성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성인 공경에서 제일 중요한 자세는 그들의 성덕을 본받는 것이다. “성인들의 발걸음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들을 공경하는 것은 다만 그들에게 공치사의 향을 올리는 것이다.”라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처럼, 오히려 성인의 표양을 묵상하고 따를 때에야 그들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배우게 된다.

 

성인의 모범을 본받는 데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한 성인의 삶을 절대화하면서 그것이 마치 모든 성덕의 전형인 것처럼 여기면서 무조건적으로 답습하기보다는 다양한 성인의 삶을 접하면서 그들 삶에서 공통적인 성덕의 삶에 영향을 받는 것이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다. 성인이 나고 자랐던 환경과 개개인의 기질과 성향 자체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수도자나 은수자였던 성인이 수시로 단식하고 철야 기도를 했다는 것을 알고는 가정주부가 이를 그대로 따라 하거나, 세상에 인연을 끊고 은수자처럼 살았던 성인을 본받아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인간관계를 멀리하면서 사는 것은 생인 공경이 뜻하는 바가 전혀 아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신심 생활 입문」에서 참된 신심은 자신의 처지와 직분에 따라 각각 고유한 신심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성인 공경 또한 개인의 능력, 일, 직무에 적합한 것이어야 하며, 해야 할 일을 방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충실하게 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나가면서

 

수많은 시복 시성 후보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성인들의 통공으로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기계적으로 기도문만 바치기보다 한 분 한 분의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하느님을 대하는 나의 자세와 이웃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점검하며, 지금의 삶을 더욱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줄을 잘 서서 어떤 요행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매료되어 물들고 닮아 결국 하나가 되는 삶이다. 그렇기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우리보다 먼저 그리스도께 매료되어 물들어 살았고 이제는 하느님의 영광을 누리는 신앙의 선배인 성인의 삶을 바라보면서 우리 또한 그들처럼 우리의 일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자 한다.

 

그러므로 참된 성인 공경은 그 성인에게만 모든 관심이 가는 게 아니라 그 성인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오히려 더욱 마음을 두게 되어, 지금의 우리 삶을 더욱더 복음적으로 살도록 이끌어 준다.

 

 


 

* 김성봉 프레드릭 – 전주교구 사제로 초남이성지에서 사목하고 있다.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에서 교의신학,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영성신학을 전공했다.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영성신학을 강의하였다.

 

[경향잡지, 2020년 11월호]

 

 


 

 

[경향 돋보기 - 진정한 성인 공경이란]

성인은 옆집에도 산다

정인숙 젬마

 

 

성덕의 소명

 

성인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시복, 시성된 성인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자 그분들이 생전에 이루신 기적이나 봉사, 비범한 애덕 행위 등을 강조하곤 합니다. 그래서 성인들에게는 평범한 우리와 다른 어떤 특수한 유전자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성인들이나 가졌을 법한 특수한 유전자는 바로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은총 안에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덕의 길을 걷기 위한 성화은총도 받기 때문입니다.

 

‘유전자’는 부모로부터 자손에게 전달되는 고유한 특정 형질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므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함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자 당신의 고유한 유전자를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성화은총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로부터 특수한 유전자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성화은총을 통해 성덕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1베드 1,16 참조). 말하자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덕을 완성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덕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성인들로부터 적잖은 거리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분들은 평범한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분, 마치 처음부터 전혀 다르게 태어나고 예정된 분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요?

 

한 사람이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 그 형질이 발현해서 성인(成人)이 되기까지는 거의 20년이 걸립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하느님의 유전자를 받아 그 거룩함이 완전히 발현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사실 성인들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을 향해 삶의 방항을 틀고(회개) 하느님을 믿는 가운데 하느님만 바라며 수십 년 동안 그분 안에서 꾸준히 성덕의 길을 걸었습니다.

 

성덕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일상의 여정을 충실히 사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분들은 그 여정의 결과로 하느님과 깊은 인격적인 사랑의 일치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로써 하느님의 나라가 온전히 그분들 안에 임하게 되었고, 그분들의 삶을 통해 이룩된 기적, 봉사, 위대한 애덕 등과 함께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이 드러난 것입니다.

 

성인들의 위대하심을 생각하며 그분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드리고 전구를 청하기도 하지만, 그분들 또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이었음에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러한 성덕에 이르렀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로써 용기를 얻어, 우리도 분발하여 성덕으로 나아가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인 공경의 의미일 것입니다.

 

성덕의 핵심

 

그러면 성덕을 이루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기적을 행하고, 여러 가지 언어와 천사의 언어를 말하고, 예언을 하며, 모든 신비를 꿰뚫어 보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고, 그저 맹목적으로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데 있을까요? 이 모든 것은 분명 훌륭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1코린 13,1-3에서 아무리 위대한 일이라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거룩함’이란 우리에게는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해지려면 그분과의 일치를 통하여 그분의 거룩함을 덧입어야 하는데, 오직 사랑만이 주님과의 인격적 일치를 이루게 해 줍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닮아 그분의 성덕을 지니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위대한 일 자체는 우리가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하고 그분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도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 사이에도 서로 참된 일치를 이룰 때는 사랑할 때입니다. 상대방의 능력이나 선물 등을 통해서는 사랑의 일치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듯 오직 하느님이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일치를 통해서만 성덕에 이를 수 있기에, 성덕의 핵심은 사랑에 있습니다.

 

어떻게 성인이 옆집에도 사는가

 

그렇다면 성덕의 핵심을 이루는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요? 다시 사도 바오로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성덕의 핵심을 이루는 사랑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왜 성인이 옆집에 사는지, 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에 대한 시복 조사가 시작됐을 당시, 성녀의 언니인 레오니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데레사는 특별히 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특징을 특별한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의 이웃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 교황 성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 가정을 부양하고자 열심히 일하는 수많은 남녀, 병자들, 한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노(老)수도자가 있습니다. 날마다 한결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에게서, 저는 투쟁 교회의 성덕을 봅니다. … 이들은 우리 한가운데에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항).

 

또한, 한국의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이 사실을 쉽게 수긍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평신도로서 가난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의 일에 적극적이었으며 성심껏 애덕을 실천한 분들이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 즉 성덕의 핵심인 사랑을 열심히 실천하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에디트 슈타인) 성녀도 말했듯이(「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항 참조), 칠흑같이 가장 어두운 밤인 박해 시대에 순교로써 그분들의 성덕이 드러난 것입니다.

 

성덕은 일상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특별히 1코린 13,4-7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사랑의 특징인 인내와 친절, 겸손과 호의, 진실과 관대함, 이타심과 용서, 믿음, 희망 등을 일상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웃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과는 구분되는 그 무엇을 느낍니다. 곧 하느님의 현존을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행하는 사랑의 덕은 하느님이신 사랑의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 곧 성령의 열매(갈라 5,22-23)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하시는 분이시기에, 성령께서 계신 곳에는 성부와 성자께서도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일치하는 그만큼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역으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의 실천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우리가 놓인 상황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상도(日常道)를 통하여 우리를 성덕으로 부르십니다.

 

성화에 동참할 수 있는 일상의 실천 방안

 

그러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상도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일까요? 성인들이 그랬듯이 먼지 하느님을 생의 최종 목적으로 삼고 우리의 모든 삶의 방향을 나 자신과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 첫걸음은 회개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만나야 합니다. 곧 기도해야 합니다. 성덕이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일치에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사랑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만나려면 시간을 내야 합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만나기 싫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만나야 그분께서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면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때 성경이야말로 그분께서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루카 10,39의 마리아처럼, 성경을 통해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필요합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독백으로 끝내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듣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려면 먼저 성모님께 그 덕을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가운데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돈독히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계속해야 그 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주님과 함께한다면, 그분께서는 어떻게 해야 이웃을 올바로 사랑할 수 있을지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할 힘도 주실 것입니다. 마르타처럼 그분을 배제한 채 내 방식대로만 이웃을 사랑하려 하면, 그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이웃을 힘들게 할 뿐입니다. 자기만족을 좇아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먼저 주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을 계속해 나간다면,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성덕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 정인숙 젬마 - 평신도 신학자.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영성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에서 10년, 서울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15년간 신학적 인간학, 영성 신학 등을 가르쳤다. 공저로 「이 시대에 다시 만난 여성 신비가들」, 역서로 「순례 영성」, 「성서 안에서의 영적 체험」 등이 있다. 현재 가르멜영성문화센터에서 강의하며 「성녀 소화 데레사 전집」을 번역 중이다.

 

[경향잡지, 202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