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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김경집의 어른은 진보다] 베들레헴과 노량진 쪽방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27.

[김경집의 어른은 진보다] 베들레헴과 노량진 쪽방

김경집 바오로(인문학자)

가톨릭평화신문 2020.12.25 발행 [1594호]

 

 

 

 

2020년은 우울한 한 해였다. 전 세계를 혼란과 공포에 몰아넣은 코로나19는 기세가 꺾일 줄 모르고 방역 경계가 격상될수록 일상생활과 자영업의 위축은 극한으로 내몰리고 있다. ‘재난의 양극화’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재난도 불평등하게 주어진다. 참 시리고 어두운 시절이다.

 

그래도 어김없이 성탄은 돌아왔다. 거리는 한가하고 캐럴도 들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성탄마저 빗겨가지는 않는다. 성탄은 희망이다. 희망은 절망하고 낙담하고 있을 때 더 생생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올해의 성탄은 쓸쓸한 게 아니라 더 큰 희망과 기다림으로 맞게 된다. 어쩌면 왁자지껄 흥청망청했던 이전의 성탄은 아기 예수의 탄생과는 거리가 먼 일 아닐까?

 

예수님은 아주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변변한 여관도 없이 주막쯤이나 될 허술한 여인숙 겨우 있는 작은 ‘면 소재지’에서, 그것도 방도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세상에서 그분보다 더 초라한 곳에 태어난 이는 없을 것이다.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곳은 어디에 있을까? 누가 가장 낮고 힘들까? 세대로 따지면 젊은이들이다. 꿈과 희망은커녕 당장 호구지책조차 마음대로 얻을 수 없는, 철저하게 내동댕이쳐진 세대들이다. 어른들은 취업 걱정해본 적 없다. 그러니 지금 청년들의 아픔과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꼭 겪지 않아도 마음의 눈을 돌리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안타깝고 미안해서 뭐라도 대책을 세울 텐데 어른들은 자기네도 살기 힘들다고 엄살떨면서 외면한다. 설령 느껴도 ‘내 새끼’만 취업이 되고 혼인까지 해서 가정을 꾸릴 수 있으면 그 공감마저 털어낸다. 그러니 청년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밀린다. 부유(富裕)한 삶이 아니라 부유(浮遊)하는 삶이다. 부유 세대는 침몰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떠다닌다. 그런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절망적일까!

 

청년들이 너도나도 노량진 학원가로 몰린다. 공무원 시험이 그들의 가장 큰 탈출구다. 심지어 대기업에 취업해도 보장된 연한은 고작 10년쯤에 불과한 세상이니 지금 좀 고생스러워도 안정된 직업으로서 공무원이 되려고 몰린다. 따뜻한 밥이 아니라 ‘컵밥’을 먹고 고시원에서 쪽잠을 자는 청년들이 몰린다. 그 가운데 얼마만큼이 그 소박한(?) 바람을 이룰까? 노력이 많고 고생이 많을수록 성취감이 크다는 ‘빈말’이나 해대는 어른들에게 그들은 더는 기대하지 않는다. 각자도생의 삶을 일찌감치 눈치챘다.

 

성당에 청년들이 없다고 한탄한다. 주일학교 교사도 채우지 못하는 성당이 부지기수다. 올 성탄은 코로나19 때문에 성탄 대축일 미사에 참례하기도 어렵겠지만, 눈을 돌려 찾아봐도 청년들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갈수록 나이 든 신자들로 채워진다. 그런데도 교회는 여전히 청년들의 삶과 현실에 주목도 개입도 하지 않는다.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신심도 깊지 않은 청년들을 우선으로 다룰(?) 여력도 관심도 없어 보인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머지않아 성당은 ‘연금생활 신자’들로 채워질 것이다. 먼 훗날이 아니다. 곧 온다. 아니, 이미 왔다.

 

아기 예수님이 지금 대한민국의 어디에서 탄생하실까, 누구에게 올까, 누구에게 오셨으면 좋을까 생각해볼 일이다. 노량진 고시촌 쪽방과 컵밥집의 청년들에게 오셨으면 좋겠다. 동방박사가 멀리서 찾아와 경배한 곳이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 그것도 마구간이었던 것처럼 교회도 신자도 노량진 고시촌 등에 있는 ‘아픈 청년’들에게 오신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면 좋겠다. 꿈꾸면 그만큼 더 상처만 크게 받을 청년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희망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는 교회라면 아무리 화려한 장식과 멋진 성가에도 황량한 사막과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베들레헴은 어디인가? 어디에 가서 경배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