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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순 시인 / 동물원 구경하기
우리 사이엔 튼실한 철조망이 있다 맹수일수록 좁은 공간에 홀로 갇혀 사는 법 나는 당신이 더 사나운 맹수라 하고 당신은 내가 더 사나운 맹수라 한다 나는 당신이 우리에 갇혀있다 하고 당신은 내가 우리에 갇혀있다 한다 나는 당신이 먼저 변했다 하고 당신은 내가 먼저 변했다 한다 서로를 향한 화살은 이제 그만 거두어들이기로 하자 만난 것도 우연이었으니 이별 또한 우연이어야 마땅해 지금은 붉은 여름이다 서로 어디를 향해 가든 뒷모습 못 본 척하기, 돌아보지 말기 하늘 아래 달라질 게 없으므로 엄살은 금물, 우-우- 울지 마라
황희순 시인 / 비창
슬개골에 숨은 半月상연골이 속삭인다 무릎을 꺾어야 해, 꺾어야 해
심장에도 半月판이 있다지, 그 반달들이 새파란 나를 청방지축 달뜨게 했던 거다
수시로 달뜨는 몸 달래주던 사람을 늙기도 전에 그만
버리고 말았다, 버리고 점점 모서리가 닳아, 밤낮없이 달아
둥근 달이 되었다 무릎이 어딘지 심장이 어딘지 아주 잊었다
뼛속에 똬리 틀고 있던 매듭이 풀려 지구를 돌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돌리며
공중곡예를 했다, 이제 반쯤 낡아 내가 나를 데리고 노는 외계인이 되었다
황희순 시인 / 수상한 수행
하나의 宇宙인 귀하고 귀한 생명* 나를 위해 백팔 배를 올린다
얼마만인가, 환해지는 이 뼈 마디마디 거실 깊이 들어온 볕에 후줄근히 땀 밴 몸 大자로 펴 널면 덕장 명태처럼 꼬들꼬들 마르겠다 꼬들꼬들 마른 살 쪽쪽 찢어 끓이면 시원한 국물 우러나겠다 묵은 숙취 풀리겠다
부처님은 어디 계신가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생명의 소리’ 명상음반에서
황희순 시인 / 숨바꼭질
커튼 사이로 칼날 같은 햇살이 들어온다 세상과 통하는 길이 저랬다, 좁은 그 길을 여닫으며 칼날 같은 말과 눈빛만 오래 주고받았다 꼭꼭 커튼을 여미지만 여민 틈새로 더욱더 예리한 빛이 스며든다 칼이 들어와도 다시는 커튼을 열지 않을 거야 살을 파고드는 빛은 들숨과 날숨으로 천천히 삭이면 돼 낮은 천장에 닿은 숨 절절 녹아내리는, 여기는 아늑한 무덤 아들아, 어미의 실종을 말하지 마라 영원히 종적을 감추고 싶지만, 꼬리가 너무 길어 비어지려는 징그러운 이 긴 꼬리를 손에 둘둘 말아 쥐고, 잠시 칼날을 피해 숨어있을 뿐이니, 아들아 어미의 무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황희순 시인 / 갇힌 기억들
철없이 아이를 기르던, 아이를 기르다 몸을 잠근, 몸 잠근 열쇠를 잃어버린, 열쇠 찾아 하수구만 뒤지던, 매일 밤 겨드랑이에 날개를 그렸다 지우던, 폭식과 거식을 반복하던, 막차 놓치는 꿈만 꾸던, 울음과 웃음을 분간 못하던, 슬픔만 파먹던, 죽을 힘 다해 찾은 열쇠로 몸을 열었던, 활짝 연 몸 착착 접어 장롱에 감추던, 장롱에 들어서야 비로소 숨을 고르던 서른 살 황희순이 20년을 한달음에 건너와 어깨를 툭 친다. 쉰 살의 적막을 흔들흔들 오가는 황희순이 비밀번호도 없이 열린다. 머리꼭지까지 고인 엄동의 바람이 피식 빠져나간다. 쭉정이 늙은 봄이 곧 또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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