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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55)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입맞춤'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3.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55)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입맞춤’

‘작별 키스’에 담긴 숨은 뜻은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의지

가톨릭평화신문 2021.10.10 발행 [1632호]

 

 

 

 

이탈리아 민족의식 태동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체제는 장화 반도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다. 프랑스 혁명의 불길은 이탈리아에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전했고, 여러 군소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장화 반도는 민족의식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한 뒤 1814년 빈 회담을 계기로, 이탈리아의 통일을 향한 행보는 본격화됐다. 그러나 갈 길은 녹록지 않았다. 지난 호에 잠시 언급했지만, 이탈리아가 통일하려면 당시 북부 이탈리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를 몰아내야 하고, 교황청의 반대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오늘날 보다시피 죽어도 이탈리아에 합류하지 않겠다고 버틴 ‘산 마리오 공화국’ 같은 나라도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시절부터 19세기 후반, 이탈리아가 통일하고 수도를 로마로 정한 뒤 교황을 ‘바티칸의 수인(囚人)’으로 만들 때까지, 그 시기의 교황과 교황령은 한 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교회 입장에서 19세기는 시작부터 숨쉬기조차 힘든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복자 비오 9세 교황은 이탈리아 통일의 급물살 속에서도 로마와 교황령 안에서 지도자로서 나름의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부흥’을 의미하는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는 곧, ‘통일운동’을 의미했고,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독립전쟁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그것을 오늘 소개하는 하예즈의 작품으로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이 작품은 남녀가 격정적인 사랑의 키스를 하는 걸로 보이지만, 역사적, 정치적 은유로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하예즈는 이 작품을 모두 4점 그렸다. 3점은 유화고, 하나는 수채화다. 모두 이탈리아 통일의 상징으로 밀라노 브레라와 암브로시아나 피나코테크에 있다.

 

독립전쟁과 세 가지 버전의 그림

 

1848년 이탈리아는 제1차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로 끝났고, 이탈리아 혼자 힘만으로는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1858년 주세페 가리발디, 주세페 마치니와 함께 이탈리아 통일의 3걸이 된 카보우르 백작 카밀로 벤소(Camillo Benso Conte di Cavour)의 제안으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비밀리에 ‘플롱비에르 협약(Plombires Agreement)’을 체결하고 이듬해, 제2차 독립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본격적인 통일에 접어들었다. 1859년 프랑스군의 원조를 얻어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고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를 점령한 것이다.

 

하예즈의 첫 번째 ‘키스’는 바로 그해, 밀라노의 명문 출신 알폰소 마리아 비스콘티 디 살리체토(Alfonso Maria Visconti di Saliceto) 백작이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에게 개인적으로 의뢰했다. 비스콘티는 프랑스와 사르데냐 왕국 간의 동맹이 가져올 ‘희망’을 그림에 담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림 속으로

 

14세기 복장을 한 청춘남녀는 중세기 한 저택의 현관에 있다. 낭만주의의 상징이 된 이 그림 속 남녀의 키스는 마지막 작별 인사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전투에 나가는 이탈리아의 젊은 병사가 연인에게 굿바이 키스를 한다. 여성은 보내고 싶지 않다는 듯 연인의 어깨를 거세게 붙잡고 있다. 남성의 왼발이 맨 아래 계단에 올린 사이, 옆구리에 찬 칼이 그의 신분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동료로 보이는 한 남성의 그림자가 왼쪽 문 저편에 있는 것 같다. 키스하는 두 주인공이 입고 있는 옷의 색깔, 곧 남성의 빨간 바지, 여성의 흰 속옷과 청색의 드레스는 프랑스의 국기 색이다. 자유, 평등, 형제애를 의미한다. 여기서 두 사람의 입맞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두 국가의 동맹관계를 상징한다.

 

그렇게 그려진 이 그림은 25년 이상 비스콘티의 호화로운 저택을 장식했다가 1886년 알폰소가 죽기 1년 전에 브레라 피나코테크에 기증했다.

 

흔히 ‘수채화 버전’으로 알려진 뒤이은 작품은 같은 해(1859년)에 작가가 연인 카롤리나 주키의 언니에게 선물용으로 그린, 달걀 형태의 작은 그림이다. 첫 번째 버전과 같은 색으로 현재 밀라노의 암브로시아나 피나코테크에 있다.

 

두 번째 유화 버전은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던 해에 그렸다. 그해 통일의 3걸은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왕으로 추대했다. 그림 속에서 여성은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이것으로 하예즈는 작품을 이탈리아 통일에 헌정했다.

 

세 번째 유화 버전은 1867년 이탈리아 통일이 완성되고, 남자의 망토 왼쪽에 초록색 외투가 추가되고 계단에 흰색 천이 앞서 남자의 빨강 바지와 함께 이탈리아 국기를 상징한다. 흰색 천과 남자의 외투 밝은 녹색이 앞의 버전에 추가됐다.

 

‘키스’라는 주제를 통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동맹이 이탈리아 통일로 이어졌고, 이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서 시작되어 단테가 한탄하기도 했던, 교황의 세속권력이 종식되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작가인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고,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함의한다고 할 수 있다. 베네치아 학파들의 파스텔톤 그림으로 학습을 시작했다. 1809년 로마 아카데미아 주최 ‘로마 견습’ 기회를 주는 대회에서 만점을 차지하며, 로마시에서 주는 장학금과 보조금을 받으며 3년간 공부했다. 이전부터 볼로냐, 피렌체, 시에나를 거쳐 로마에 안주하는 과정에서 라파엘로를 깊이 연구했고, 로마에서 여러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고 있던 안토니오 카노바를 만났다.

 

로마의 치코냐라 공작은 그를 두고 “위대한 이탈리아 회화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줄 인물”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카노바의 도움으로 카피톨리니 박물관과 키아라몬티 박물관에 수집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작품들을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바티칸 궁전에서 라파엘로의 작품들을 만났다. 이런 경험은 성경과 역사, 인물을 주제로 바로크와 로코코의 웅장하고 화려한 기법이 아니라, 단순하고 명료한 신고전주의에 안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예츠는 1820년을 전후로 밀라노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낭만주의 분위기를 접했고, 유명 정치인들과 접촉하며 당대 명사들의 초상화로 이름을 얻었다. 극도로 세밀한 묘사와 인물의 미세한 감정변화까지 포착해내는 낭만주의적 정교함으로 큰 찬사를 받았고, 1850년 브레라 아카데미아에서 회화 분야 학과장이 됐다. 이후 그는 고전주의 분위기에 개인적인 감성과 인간과 자연의 자연스러운 동화를 통해 낭만주의적인 색채를 드러냄으로써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의 이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82년 91세를 일기로 밀라노에서 생을 마감했다.

 

낭만주의의 가장 위대한 해석자

 

이탈리아 통일의 영감을 불어넣었던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는 밀라노에서 활동하며 애국심이 투철한 하예즈를 두고 “19세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이상주의 화가”, “이탈리아에서 국가주의 사상이 요구하는 역사회화의 수장”이라고 극찬하며, 낭만주의의 가장 위대한 해석자로 꼽았다. 스탕달도 그를 두고 낭만주의적 이상을 가장 장엄하게 해석한 몇 안 되는 이탈리아 예술가 중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하예즈가 ‘키스’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사적인 감정과 애국심이 동일한 맥락에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감정과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국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잠시(혹은 영원히) 헤어지는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소르지멘토의 낭만적, 민족주의적, 애국적인 이상을 상징하며, 19세기 이탈리아의 정치적 변화를 색으로 함축한 탁월한 작품이다.

 

(美)와 사랑, 거기에 애국심까지 담긴 이 작별의 ‘키스’는 이탈리아 국가 탄생의 상징이 되었다. 이것은 비오 9세 교황의 정치력과 외교력이 아무리 훌륭해도 이탈리아가 통일로 가는 운명의 물꼬를 되돌리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혜경 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부산 가톨릭대 인문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