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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중식 시인 / 금연 포기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8.

김중식 시인 / 금연 포기

 

 

다리 꼰 조개가 숯불 위에서

처녀 역사力士처럼

지붕을 들어올리고 있다.

속을 끓이고 있었다는 거다.

 

만년설 지구 지붕이

구름에 턱 괴고 모자 벗어 인사하는데

오랜만에 찾아오신 깨달음 하나

즉, 피는 것도 집착이지만 끊는 것도 집착!

뭔 삶을 그리 아메리칸 퀼트처럼 이어붙이시나!

열 달 끊은 담배를 이어피면서

그래, 집 사는 일만 포기하면 돼.

시인도 둘만 모이면 아파트 이야기를 하는 세상에서

그래, 침묵하면 돼.

 

에베레스트 가는 길 해발 오천오백미터 베이스캠프

잠든 턱이 희미한 산소 속에서

조개구이처럼 쩍쩍 벌어지고 있다

입안이 끓고 있었다는 듯이,

숨 쉬는 게 불무질이라는 듯이,

뭔 삶이 이리 숯불인지.

그래, 사는 일만 포기하면 돼.

끊은 일을 다시 끊어버리면 돼.

 

 


 

 

김중식 시인 / 다시 해바라기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해서 오아시스에서 만난 해바라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딱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존재감

사막 전체를 후광(後光)으로 지닌 꽃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죄 없이 태어난 생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성모(聖母) 같다

검은 망사 쓴 얼굴 속에 속울음이 있다

너는 살아 있으시라

살아 있기 힘들면 다시 태어나시라

 

약속하기 어려우나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

 

 


 

 

김중식 시인 / 황금빛 모서리

 

 

뼛속을 긁어낸 의지의 대가(代價)로

석양 무렵 황금빛 모서리를 갖는 새는

몸을 쳐서 솟구칠 때마다

금부스러기를 지상에 떨어뜨린다

 

날개가 가자는 대로 먼 곳까지 갔다가

석양의 흑점(黑點)에서 클로즈업으로 날아온 새가

기진맥진

빈 몸의 무게조차 가누지 못해도

 

아직 떠나지 않은 새여

피안(彼岸)을 노려보는 눈에는

발 밑의 벌레를 놓치는 원시(遠視)의 배고픔쯤

헛것이 보여도

현란한 비상(飛翔)만 보인다

 

 


 

 

김중식 시인 / 경청

 

 

이와 같이 들었다;

나의 태생은 천해서

정충과 난자가 이룩한 버러지였으나

짐승을 벗어난 때는

내 귀가 그대 말씀에 쏠린 이후였다고

 

이와 같이 들었다

첫사랑은 환각의 춤이였다고;

아이스크림 떠먹은 스푼을 입술에 물고 오래 빨던

살아있는 인형,

나의 넋은 첫 키스에 녹아버린 것이었다고

 

이와같이 들었다

상처를 딛고 깊어진 영혼으로

나의 거짓말마저 슬퍼하면서

아프게 들어준 그대;

제 몸을 녹여 진주를 만들듯이

 

나의 짐승 가죽까지는 아니더라도 짐승 털을 뽑아 준 그대;

세상을 비웃던 내가 고마운 세상을 느낀 때는

두 눈 똑바로 뜨고

그대 입술 보면서

귀를 연 순간이였다고

 

나는 들었다;

 

그대 입술을 포개기 전까지

나는 버러지 이하였다고

 

 


 

 

김중식 시인 / 신재생 알코올 에너지

 

 

되는 일도 없지만

딱히 할 일도 없을 때

다른 세상으로 보내주는 마약

 

잠시 먼 곳으로 소풍 가서

시인은 방언을 하고

여인은 사슴 눈을 달고 나온다우

뼈와 뇌의 고단함을 달래는

실신失神의 물방울,

단군 이래 증가하는 재생 에너지에 한 표!

 

한 글자까지가 신의 선물,

사랑조차 두 글자,

사랑조차 사람이 하기 나름

 

일 끝나면

새도 아닌데 날아다닐 시간

취해서 읽은 시가 아름다우므로 또 마신다우

 

사랑은 살아있다는 것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지만,

술은 살고 있다는 것을 잊게 해준다우

 

 


 

 

김중식 시인 / 물결무늬 사막

 

 

이 땅에 언제 파도가 왔다 갔는지

사막 전체가 물결이다

멀리서 바다였는데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

소금 사막에 묻힌 미라는

만 년간 잘 잤네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할 때

우리는 다가가면서 멀어진다

우는 이유를 잊을 때까지 우는 여자여

우리는 가끔씩 울어야 한다

우주가 좁도록 세포분열하는 아메바처럼

우리는 만난 적도 없는데 한가득 헤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건

가을 숲 불꽃놀이가 끝나더라도

우리가 할 일은 봄에 꽃을 피우는 것

가장 깊은 상처의 도약

가장 뜨거웠던 입의 맞춤

할례당한 사막 고원에 핀 양귀비처럼

 

언제 파도가 왔다 갔는지

사막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할 때

우리는 다가가면서 멀어질지라도

봄의 할 일은

꽃을 피우는 것

 

 


 

 

김중식 시인 / 나비를 추억함

 

 

그녀는 소시적부터 처세술에 모범을 보이신 몸이셨다

난세의 시인처럼

남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번데기

애벌레의 모습으로 은둔하여

쓰레기 같은 세상이

치근덕거리지 않도록 처신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또한 영웅에 가까운 몸이셨다

卵生 설화를 가졌고

미운 오리새끼들이 그냥 미운 오리 어미들로 돼버렸을 동안

관 크기의 어둡고 축축한 지하방에서

色과 향기의 유혹을 참아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聖人에 가까운 몸이셨다

어느 날, 관 뚜껑을 박차고 나왔을 때

오 황금빛 날개

입맞추는 자리마다 오

꽃이 피어나도다

꽃이 피어나도다

그것은 거의 부활, 기적의 변신

 

그때부터 그녀는 春畵圖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김중식 시인 /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시인 / 완전무장

 

 

낙타는 전생前生부터 지 죽음을 알아차렸다는 듯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다닌다

고통조차 육신의 일부라는 듯

육신의 정상頂上에

고통의 비계살을 지고 다닌다

전생前生부터 세상을 알아차렸다는 듯

안 봐도 안다는 듯

긴 속눈썹을 달고 다니므로

오아시스에 몸을 담가 물이 넘쳐 흘러도

낙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는다

전생前生부터 지 수고를 알아차렸다는 듯

고통받지 않기를 포기했다는 듯

가능한 한 가느다란 장딴지를 달고 다닌다

짐이 쌓여 고개가 숙여질수록 자기 자신과 마주치고

짐이 더욱 쌓여 고개가 푹 숙여질수록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보이는 세상

오 그러다가 고꾸라진다

과적過積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

최후로 덧보태진, 그까짓, 비단 한 필 때문이라는 듯

고꾸라져도 되는 걸 낙타는

이 악물고 무너져버린다

죽어서도

관棺 속에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들어간다.

 

 


 

 

김중식 시인 /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밤늦게 귀가 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하루 열 여섯 시간의 노동을 하는 어머니의 육체와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돌아온 내 피로의 끝을 보게된다

돈 한푼 없어 대낮에 귀가 할 때면 큰 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은 막다른 골목 같다.

옐로우 하우스 빨간 벽돌 건물이 집 앞에 있는 데

거기로 들어가는 사내들보다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사내가 더 허기져 보이고

거기 진열된 여자보다 우리집의 여자들이 더 지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대신 내가 영계백숙 음식을 배달 갔을 때

나 보고는 나보다도 수줍음을 타는 아가씨,

붉은 등 유리 방 속에 한복 입고 앉은 모습이 마네킹 같고 불란서 인형 같아서

내 색시 해도 괜찮겠다 싶더니만 반바지 입고 나설 때 보니까 이건 순 어린애다.

그 남자친군지 팔짱을 끼며 유곽 골목을 나서는 발걸음을 보면

밖에 나가서 연애할 때 우린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에 사는 가난뱅이라고

경쾌하게 말하지 못하는 내가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공장 노조원들이다

내가 말을 걸어본지 몇 년째 되는 우리 아버지에게 아버님들이라 부르고

용돈 탈 때만 말을 거는 어머니에게 어머님이라 부르는 놈들은

나보다도 우리 가정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

하루는 놈들이 일부러 들으라는 목소리로 일부러,

부모님이 고생해서 대학이나 보내 놨더니 놀고먹는 다고,

기생충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상처를 준적이 있는 잔인한 놈들.

지네들 고장에서 날아온 검은 가루 때문에 우리집 빨래가 햇빛한번 못 쬐고

방구석 선풍기 바람에 말려진다는 걸 모르고,

놀고먹기 때문에 내 살이 바짝바짝 마른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내심 투덜거렸지만 할 말은 어떤 식으로든 다하고 싸울 일은 투쟁하는 그들에 비하면

그저 세상에 주눅들어 굽은 어깨, 세상에 대한 욕을 독백으로 처리하는 내가 더 끝이다.

절정은 아니면서 없는 적을 만들어 칼을 들고 달겨들어야만 긴장이 유지되는

내가 더 고단한 삶의 끝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은 쓰레기 하치장이어서 여동생의 연애를 얼마나 짜증나게 했는지,

집에까지 바래다 주겠다는 연인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했는지,

그래서 그 친구와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눈물을 꾹 참으며 아버지와 오빠의 등뒤에서 스타킹을 걷어 올려야 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속옷을 갈아 입어야하는 하는 여동생들을 생각하게 된다.

보름 전쯤 식구들의 가슴위로 쥐가 돌아다녔고

모두 깨어 장롱을 들어내고 벽지를 찢으며 쥐를 잡을 때,

밖에 나가서 울고 들어온 막내의 울분에 대해,

울음으로써 세상을 견뎌내고야 마는 여자들의 인내에 대해,

단칸방에 살면서도 근친상간 한번 없는 순흥 안가의 저력에 대해,

아침녘 밥손님들이 들어 닥치기 전에

제 각기 직장으로 학교로 공원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탈출의 나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 혹시 지인이라도 방문해 있으면

난 막다른 골목을 넘어 넘고넘어 멀리까지 귀향을 떠난다.

큰 도로로 나가면 철로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기차가 있다.

가끔씩 철로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처연하게 걸어다니는 데

철로의 양끝은 흙 속에 묻혀있다.

길의 무덤을 나는 사랑한다.

항구에서 창구까지 이어진 짧은 길의 운명을 나는 사랑하는 것이며

뛰는 사람보다 더디게 걷는 기차를 나는 사랑한다.

나를 닮아 있는 힘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

철로의 무덤 넘어엔 서해가 있고

더 멀리 가면 중국이 있고 더더 멀리가면 인도와 태평양과 속초가 있어

더더더 멀리가면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의 끝에 있는 집,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되는 눈물겨운

우리집.

 

 


 

김중식 시인

1967년 인천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에「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 등 몇 편의 작품이 추천되어 시단에 등단. 현재 『경향신문』에서 근무하고 있다. 시집으로 『황금빛 모서리』(1993), 『울지도 못했다』2018, 가 있음. 산문집 『이란-페르시아 바람의 길을 걷다』,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