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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지인 시인 / 살과 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3.

최지인 시인 / 살과 뼈

 

 

콩 심는 사람

 

늙은 농부가 온 생을 농약 치다 병 걸려 마루에 누워 있다

요양원 버스 기다리다 변을 지린 줄도 모르고 깜빡 잠들었다가

혼자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빨래를 한다

 

어제저녁 셋째 딸 내외가 마당에 두고 간 산호수를

뿌리째 뽑아 논두렁에 내팽개친다

 

수십 년 기른 사과나무들은 모두 베었다

새벽녘에 나가 해가 지면 트랙터 라이트를 켜고 늦게까지 일하던 때가 있었다

 

땡볕 아래 농부들

줄지어 서 있다

 

허리춤에 찬 주머니

콩이 가득하다

 

벽이 있던 자리

 

마흔이 되던 해에 회사를 그만두고 고용센터 민원 대기실에 앉아 손에 쥔 대기 번호가 불리길 기다리는 선배에게 지나온 삶은 행복이었을까 절망이었을까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크래커

 

인간은 왜 죽을힘을 다해 일하는 걸까

 

함께 일했던 동료 두 명은 쓸모없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대체할 수 있는 것들

 

포개져 있는

 

무해한 사람들

 

오래된 일

 

장어의 머리에 송곳을 박아 도마 위에 고정하고 칼로 등에서 꼬리까지 포를 뜨듯 갈랐다 내장을 꺼내고 뼈를 발랐다

산 것의 숨을 끊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매일 살아 있는 장어를 손질하는 주방장은 꿈에서도 장어를 손질한다며 가끔은

내가 장어가 되기도 하고

잡아먹히기도 한다며

 

나는 손을 베였고

하얀 플라스틱 도마 위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청소년기 1

 

엄마가 일본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같은 반 남자애가 내 바지 속에 손을 넣어 성기를 주물렀다 그 애는 나를 노려보며 소리를 내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청소년기 2

 

놀이터 그네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친구는 다음 해 유리 공장에 취직했다 그의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였다 우리는 가는 길이 달랐다

 

졸업식을 앞두고 그는 아버지 차를 몰래 끌고 나왔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대시보드에 발을 올리고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 우리는 숲길을 달렸다 계속해서 달렸다

 

Fight the Power

 

“대부분 문제가 될 때까지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요. 2020년대에는 모든 게 소수자에게 불리했어요. 특히 가난한 소수자들에게요.”

 

1981~2020

 

영혼과 영혼이 이어져 있다고 믿으면

유령의 말을 받아 적을 수 있다

 

나무가 된 사람

 

형은 노력해서 무언가 되고자 했다

 

소중한 것을 앞에 두고

 

당장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형이 살아 있는 동안에 쓴 시는 모두 미완성이었다

 

그것들은 이제 완성되었다

 

계간 『시마』 2021년 가을호 발표

 

 


 

 

최지인 시인 / 컨베이어

 

 

자유로에서 파주출판도시로 빠져나갈 때

우리가 벌써 삼십 대가 되었고

변하지 않은 것은 과거뿐이라는 걸 알았다

 

친구를 태우고

식당에서 만둣국을 먹는 동안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어느새

바닥이 보였다

 

필로티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그게 무엇이었든

영원하길 바라던 때는

지났다

 

대기 발령 중인 친구는

잠이 오지 않는다며 물류센터에 나가 일했다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물건들을 분류했다

 

나는 곧 잘릴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라질 것이다

더 이상 슬픔은 없다

 

그동안 무얼 했는데?

 

사실 저는 일 말고 다른 것을 좋아했습니다.

 

무대에 선 친구가 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유명해지거나

가난해지거나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네

너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겠지

하루 열여섯 시간

여섯 명의 몫을 하기에 우리는

벌써 늙어버렸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끝끝내

살아간다는 것을

들것에 실려 나가기 전에

 

알고 있었던 것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건 정규직이라는 사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보상이 적다는 사실 한 번 일자리를 잃은 이는 계속해서 자리를 잃게 될 거라는 사실

 

아스팔트에 쓰러진 운전자와 찌그러진 범퍼 앞에서 전화하는 운전자와 옆으로 누운 오토바이를 피해 서행하는 운전자

 

혼자 남은 나에게

혼자 남은 너에게

 

산 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나는

 

계간『푸른사상』 2021년 겨울호 발표

 

 


 

 

최지인 시인 / 이번 여름의 일

 

 

시베리아가 불타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나리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날려버린 시간을 만회하려고 애를 썼다

 

운이 나빴다고도 할 수 있다

 

며칠째 두통에 시달리는 너에게

괜찮아질 거라는 말만

 

잠을 청하며 슬픔에 잠기곤 했는데

 

어제 집계된 감염자의 수와 두려움과 가난과 외로움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돈 버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었다 갓 서른을 넘겼을 뿐인데 다 늙어버린 것 같다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너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

 

이것은 모두 이번 여름의 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과 얼마나 멀어진 걸까

 

폭우가 계속되는 계절

 

고양이들은 어디서 비를 피하는 걸까

 

계간 『작가들』 2020년 겨울호 발표

 

 


 

최지인 시인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으로 『나는 벽에 붙어 잤다』,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가 있음. 제10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혜. 창작동인 〈뿔〉과 창작집단 〈unlook〉에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