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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6. 100년 전의 연극대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7.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6. 100년 전의 연극대본 「고려치명 주아각백전략」

100년 전 주문모 신부 시복 기원하며 입국~순교 과정 10막으로 구성

가톨릭평화신문 2022.02.13 발행 [1649호]

 

 

 

 

1920년대 초 중국 강소성 천주교회의 연극대본

 

「한어기독교진희문헌총간(漢語基督敎珍稀文獻叢刊)」(중국 광서사범대학출판사, 2017) 제1집 제10책은 조선 천주교의 역사를 기록한 책만 따로 묶었다. 1879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은정형(殷正衡, 1840~1914) 신부가 중경(重慶)에서 펴낸 「고려주증(高麗主證)」 5권 2책과 1900년에 중국인 신부 심칙관(沈則寬, 1838~1913)이 상해에서 간행한 「고려치명사략(高麗致命史略)」 1책이 그것이다.

 

이 책 끝에 「고려치명 주아각백전략(高麗致命 周雅各伯傳略)」이란 낯선 이름의 책이 실려 있다. 놀랍게도 이 책은 조선에서 순교한 주아각백(周雅各伯) 즉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일생을 정리한 연극 대본이다. 앞의 두 책과 달리 필사본인데다, 작가나 창작 시기에 대한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그 내용을 살펴보니 「고려치명사략」 속에 실린 주문모 신부 관련 내용에 기초하여, 이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쓴 창작 연극 대본이었다. 원본에 ‘상해 서가회(徐家匯) 천주당 장서루인(藏書樓印)’이란 장서인이 찍혀 있다.

 

이 연극 대본은 언제, 누가, 왜 지었을까? 제10막 에필로그 부분에 단서가 들어 있다. “현재 로마에서 예비심사를 진행 중인, 조선에서 순교한 몇 분의 주교와 신부의 안건이 예비로 진복품(眞福品)과 성품(聖品) 등등에 포함되어 있다. 다시 여러분께 청하니, 이분 주 신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중국 신부이고, 우리 본성(本省)의 소주부(蘇州府) 사람이다. 하루아침에 진복품에 오르게 된다면 우리 강소(江蘇) 사람에게 영광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천주께서 주 신부께 상을 내려주시어 일찍 진복품에 오르게 해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이다. 아멘.”

 

로마 교황청에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때 순교한 79위의 시복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진복품, 즉 복자품에 오르게 된 것은 1925년 7월 5일의 일이다. 윗글에서 이들의 시복 시성을 위한 예비심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으니, 이 대본은 1925년 이전 시복시성 재판에 앞서 예비심사가 이루어진 1923년 3월 이후 24년 사이에 창작된 것이다.

 

‘본성(本省)’이라 말한 것에서 창작 주체가 강소성(江蘇省) 천주교회였음을 알겠고, 목적은 강소성 소주부(蘇州府) 출신인 주문모 신부가 하루속히 복자품에 올라 강소성 천주교회에 큰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는 취지였다. 당시 로마에서 진행 중이던 청원에는 주문모 신부 등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는 포함되지 않았었다. 재판 신청이 파리외방전교회에 의해 주도되었고, 조선에서 순교한 외방전교회 출신 프랑스 신부의 시복시성에 초점이 놓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심사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하루라도 빨리 중국인 복자와 성인을 내야겠다는 열망도 얼마간 작용했다. 당시는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지 12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중국 강소성 신자들은 애초에 주문모 신부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다가, 「고려치명사략」을 보고 주문모 신부가 강소성 소주부 출신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고, 그의 순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때 마침 조선 교회의 순교자 시복 재판 소식이 중국 교회에 알려졌던 모양이다. 이 명단에 주문모 신부가 빠진 것을 보고 그의 시복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10막으로 구성된 스케일 큰 무대

 

주문모 신부의 일대기는 장장 10막으로 펼쳐지는 규모가 큰 무대였다. 매 막마다 서두에 8자 또는 7자 2구로 내용을 간추렸고, 뒤이어 각색(脚色)이라 하여 등장인물을 소개했다. 이후 지문과 대사, 그리고 방백으로 줄거리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제1막부터 10막까지 제목은 이러하다.

 

①조선 사람이 북경에서 주교를 찾아뵙고, 서신을 읽은 주교가 손님을 머물게 하다(高麗人北京見主敎, 念書信主敎留客人) ②윤유일 바오로가 답장을 지니고 조선으로 돌아오고,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주교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다(尹祿帶信回高麗, 權方濟樣樣聽主敎) ③제상(祭箱)을 보내오자 교우들이 크게 기뻐하며, 빨리 신부를 보내 줄 것을 천주께 기도하다(送祭箱敎友大歡喜, 求天主快賜神父來) ④주 신부가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오자, 여러 교우가 새 신부를 환영하다(周司鐸初次進高麗, 衆敎友歡迎新神父) ⑤주 신부가 서울에 머물며 조선말을 배우고, 여러 교우가 나아가 주 신부를 뵙다(周司鐸住京學方言, 衆敎友晉謁周司鐸) ⑥최인길 마티아가 주 신부로 가장하고, 주 신부는 잠시 강완숙의 집으로 피하다(趙瑪弟假裝周司鐸, 周司鐸暫避姜姓家) ⑦주 신부가 위험을 피할 뜻이 있었으나, 천주의 뜻으로 다시 조선에 돌아오다(周司鐸有意避危險, 天主意仍舊回高麗) ⑧주 신부가 자수하여 아문에 이르니, 심판관이 참수형으로 판정하다(周司鐸自投到衙門, 審判官判定斬首刑) ⑨사형집행장에서 주 신부가 순교하자, 큰 우레와 비가 쏟아지는 변고가 일어나 사람들이 놀라 깨닫다(押法場周司鐸致命, 大雷雨天變驚醒人) ⑩주 신부가 순교한 영광을 조선 사람들은 지금껏 잊지 않고 있다(周司鐸致命光榮, 高麗人至今不忘)

 

연극은 이렇듯 1790년 1월 윤유일이 북경성당으로 구베아 주교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귀국 후 조선 교우들의 환호와 주문모 신부의 입국, 이어 실포 사건과 피신, 자수, 순교에 이르는 도정을 장면별로 간추려 표현했다.

 

대본은 조선 천주교 순교사를 정리한 「고려치명사략」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전체 23장 중 특별히 제4장 ‘중국 신부가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가다(中華司鐸首進高麗)’와 제5장 ‘주 신부가 주님을 위해 순교하다(周司鐸爲主致命)’에 나온 이야기가 주축을 이루었다.

 

제상(祭箱) 속에 담긴 성물

 

현재 남아 있는 연극 대본은 원본이 흐리고, 중간중간 글자가 많이 탈락되어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여기에 더해 지역 사투리가 강하게 반영된 백화문의 본문은 ‘로()’나 ‘로사()’, ‘탁()’ 등 지금은 쓰지 않는 생경한 옛 말투와 표현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접근이 더 어렵다.

 

그럼에도 내용 중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적지 않다. 이승훈의 배교 사실을 강조해서 기록하고, 그의 배교 이후 신자들의 공의로 권일신을 새 주교로 세웠다는 이야기, 그리고 권일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낸 이야기 등이 나온다. 특별히 이류사(李類思)란 인물이 여러 차례 비중 있게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이다.

 

또 제3막에 보이는 윤유일이 주교에게서 받아온 제상(祭箱)에 담겼다는 내용물 대목도 흥미롭다. “다만 제상(祭箱) 뿐이지만 미사 때 신부가 입는 장백의(長白衣)와 성삭(聖索:허리띠)과 영대(領帶: 목띠), 성석(聖石), 성경, 경문 카드(經頁子), 미사주(彌撒酒), 성체(阿斯底亞: 아스티아, 성체의 라틴어 Eucharistia의 음역)를 만드는 집게[鉗: 제병기], 복사가 입는 단백의(短白衣), 미사 때 쓰는 성작(聖爵)과 성반(聖盤), 성체(聖體)를 줄 때 쓰는 성합[聖爵], 성체(聖體)가 빛을 내며 색색을 두루 갖추고 이지러진 데 없는 성광(聖光)이 들어 있었다.”

 

사실 윤유일이 제상과 미사 물품을 받아온 것은 1차 북경 방문 때가 아닌, 1790년 9월 2차 방문 때였다. 대본에서는 이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달레는 이때 윤유일이 성작 1개, 미사경본 1권, 성석 1개와 미사성제 거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왔다고만 썼다. 이 물건들은 이때 북경성당에서 새로 세례를 받게 된 성이 ‘오씨’ 또는 ‘우씨’였을 수행 관리가 왕명으로 사가지고 가는 물품이 담긴 상자 속에 같이 담겨 국경을 통과했을 것이다.

 

제8막 끝에 1801년 4월 19일에 사형 언도를 받은 뒤, 신부의 최후 진술은 이렇다. “대노야께서 저에게 참수의 큰 은혜를 내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귀국에 와서 전교하며 신자들에게 권면한 종지(宗旨)는 하루라도 편안히 죽고 잘 마침을 얻기를 기도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제 선종할 날짜를 판정해 주시니, 제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온지요. 천주께서 저처럼 비천한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순교의 영광이란 큰 은전을 상으로 내려주시니,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교중(敎衆)에게 청하노니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시다.”

 

이렇게 주문모 신부는 순교의 영예로운 화관을 썼다. 이어지는 제9막 끝, 참수 장면의 묘사를 보자. “망나니가 귀에다 화살을 꽂더니, 주 신부를 끌고 세 차례 돌게 하고는 돌아 세워 한가운데로 오게 한다. 주 신부는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드리워 형 집행을 기다린다. 망나니가 칼을 뽑아 막 목을 베려 하자 우르릉 꽝하는 소리가 난다. [막이 내린다] 갑자기 비바람과 우렛소리가 들리며 번갯불이 번쩍번쩍한다.”

 

참수 죄인의 귀에 화살을 아래위로 꽂는 것은 목을 자른 뒤 화살 끝에 끈을 묶어 도르래로 머리를 달아 올려 장대 끝에 매달기 위함이었다. 목이 잘리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은 채 막을 내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음향과 조명 효과로 대미를 장식했다.

 

전체 10막으로 구성된 이 연극 대본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에서 순교까지의 과정을 장엄하게 담아냈다. 이제껏 이 자료는 상해 서가회(徐家匯) 장서루 속에 보관되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2017년에야 처음 공개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중국 강소성 신자들이 신부의 시복 청원을 위해 연극 대본을 만든 지 정확하게 90년 뒤의 일이다. 현재 주문모 신부의 시성 재판이 진행 중이고, 2022년은 한중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주문모 신부를 포함한 동료 순교자들의 시성 축원을 위해 이 연극 대본이 양국에서 무대에 올려지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된다면 실로 멋진 일이 될 것이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