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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0. 폐궁의 여인들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4.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0. 폐궁의 여인들

신앙에 목말랐던 폐궁의 여인들,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 받아

가톨릭평화신문 2022.03.13 발행 [1653호]

 

 

 

▲ 사학징의 중 이조이의 공초기록 부분.

 

고인 물속에 전해진 복음

 

신유박해 순교자 중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李, 1754~1801)의 처 송 마리아(1753~1801)와 며느리 신 마리아(1769~1801)의 존재가 눈길을 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동생이었던 이인은 강화로 귀양 가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고, 신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아들 상계군(常溪君) 이담(李湛, 1769~1786)은 홍국영의 모의에 연루되어 1786년 11월에 이미 자살로 생을 마감한 상태였다.

 

국왕의 친동생으로 산다는 것은 차라리 잔혹한 형벌에 가까웠다. 국왕 정조는 하나 남은 동생의 목숨을 지켜주려 안간힘을 썼지만 주변에서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은언군이 죽어야만 끝날 일이었다. 은언군의 서울 집 양제궁(良宮)은 송현(松峴) 인근 전동(洞)에 있었다. 지금의 조계사 뒤편 종로구 수송동 일대다. 양제궁은 1786년 은언군의 강화 유배 이후 폐궁(廢宮)으로 불렸다.

 

폐궁에는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그녀의 며느리이자 죽은 상계군의 부인인 신씨가 살았다. 폐궁은 늘 깊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바깥출입 없이, 나인 몇이 수발을 들었다. 고인 물로 썩어가던 시간이 여러 해 지났을 때, 그녀들의 불행한 처지를 동정한 한 여교우가 찾아와 복음의 희한한 소식을 전했다.

 

폐궁을 찾아와 전교한 여교우에 대해서는 주문모 신부가 진술한 내용이 따로 있다. “폐궁의 집안사람이 천주교를 받든 것은 제가 조선에 들어오기 여러 해 전입니다. 들으니 그때 조씨(趙氏) 성의 한 노파가 궁에 들어가 이를 권하였다고 합니다. 이 노파는 바로 서씨 나인의 외조모라더군요.” 「추안급국안」에 나온다.

 

이때가 1792년 즈음이었다. 당시 그녀들은 바싹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주문모 신부의 입국 소식을 알게 된 그녀들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1799년 즈음에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던 듯하다.

 

하지만 이들의 입교는 자칫 전체 교회에 큰 재앙을 불러올 단초가 될 수도 있었으므로 아무도 이들과 접촉하려 들지 않았다. 강완숙만 용감하게 폐궁으로 직접 찾아가서 그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가 하면, 신부를 직접 모시고 가서 성사를 받게 하기도 했다. 신앙에 목말랐던 그녀들은 밤중에 주문모 신부가 머물고 있던 근처 충훈부 후동 강완숙의 집으로 여러 번 직접 찾아가서 교리 교육을 받았고, 이후 성사를 받고 세례명을 얻었다. 두 사람에게 똑같이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지어준 것은 신부의 뜻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교회의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달레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신부를 궁에 모셔 들이는 것이 기뻤다. 신부가 거기 있을 때에는, 홍익만 안토니오의 집과 붙어 있어서 벽에 비밀리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그 집과 왕래할 수 있는 따로 떨어진 방에 숨어 있었다.” 강완숙은 그녀들을 특별히 관리하기 위해 아들 홍필주의 장인인 홍익만 안토니오를 그 옆집에 이사시켜, 비밀 통로를 통해 신부가 그 집에 드나들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녀들의 인도로 폐궁의 나인 강경복과 서경의가 입교했고, 나중에 이들은 함께 명도회의 지부를 구성해서 회원으로 활동했다.

 

조씨 노파와 사학교주 이조이

 

폐궁의 두 여인에게 처음 서학을 전한 조씨 노파는 누구였을까? 주문모 신부는 그녀가 뒤에 폐궁 나인으로 들어간 서경의의 외조모라고 했다. 앞서 사학매파 3인방을 얘기하면서 김연이가 폐궁 전담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과 밀접하게 접촉했던 사람 중에 홍정호(洪正浩) 또는 홍시호(洪時浩)로 불린 이의 어머니로 초기 교회 조직에 깊숙이 참여했던 이조이(李召史)가 더 있다. 이조이는 1755년 나주 괘서 사건 당시 역모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역적으로 사형당한 여선군(驪善君) 이학(李)의 서녀(庶女)였다. 이학은 인조(仁祖)의 아들인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의 3세손으로 영조와 항렬이 같았다. 말하자면 그녀는 왕가 혈통의 서녀였다. 「추안급국안」에 홍시호의 어미가 동대문 밖에서 격쟁하여 그 선인의 원통함을 밝히려 했다는 얘기가 실린 것을 보면, 그녀가 부친 이학의 죽음을 억울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조이는 풍산 홍씨 집안의 서족인 홍탁보와 결혼하여 홍정호를 낳았다.

 

그녀는 「사학징의」에 실린 1801년 11월 23일 한성부의 이문(移文)에서 ‘사학교주(邪學敎主)’, 또는 ‘사설정범(邪說正犯)’, ‘추류본색(醜類本色)’으로 지목되었다. 아들 홍정호가 어미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1801년 5월 22일에 사형을 당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녀는 끌려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눈을 꽉 감고 매질을 참으면서 끝까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학징의」에는 이조이의 아들 홍정호가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와는 가까운 인척 간이라고 소개했다. 홍필주의 증조부 홍석보(洪錫輔)와 홍정호의 부친 홍탁보(洪鐸輔)가 항렬이 같아, 직계일 경우 촌수로 따져 6촌간이 된다. 두 집안 모두 서족이긴 해도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와 가까운 일가였다. 강완숙은 혜경궁의 7촌 서질부(庶姪婦)였다. 이조이는 후에 홍탁보와 이혼하고 조봉상(趙鳳祥)과 재혼하였다. 여기에는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곡절이 있는 듯 한데, 남은 기록이 더 없어서 살필 수가 없다.

 

이조이가 재혼한 남편 조봉상은 1801년 3월 3일에 포도청으로 끌려왔다. 그는 1791년 8월에 이윤하의 전도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이윤하는 이경언 바오로와 이순이 루갈다의 부친이다. 조봉상은 포도청의 공초에서 자신의 아내 이조이가 여러 해 전부터 사학을 하느라 전동 폐궁을 자주 드나들었고, 사위의 전실(前室) 딸인 서경의(徐景儀)가 과부로 지내다가 5년 전 폐궁의 나인으로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여기서 다시 폐궁 나인 서경의가 호명된다. 서경의는 조봉상의 사위 서종주(徐宗柱)가 전실에게서 얻은 딸로, 조봉상의 의붓 외손녀다. 그러니 이조이가 바로 그녀의 외조모가 되는 셈이다. 주문모 신부가 이조이를 조씨 노파라고 한 것은 남편 쪽의 성씨로 불러서 생긴 착오로 보인다.

 

조봉상은 의붓 외손녀 서경의가 폐궁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이조이가 그 집을 들락거리게 되었다고 했다. 사실은 이조이가 서경의를 폐궁 나인으로 추천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왕실의 자손으로 억울하게 역모에 연루되어 아버지 이학을 잃은 이조이와, 남편이 임금의 친동생임에도 강화로 귀양 가 목숨이 위태롭고, 아들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송씨의 처지는 확실히 동병상련의 지점이 있었다.

 

이조이는 1801년 검거 당시 나이가 70세를 넘겼고 중풍으로 거동마저 불편한 상태였다. 아들이 이미 사형을 당한 상황이었고, 막상 고령인 자신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1801년 12월 20일에 진주로 유배 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사학징의」의 여러 기록을 통해 볼 때 당시 교계에서의 위상은 홍정호 모자와 홍필주 모자가 대등했다. 당시 교회 내에서 이들의 역할과 비중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홍정호는 당시 자신의 집에 주문모 신부를 4, 5차례나 모셔올 만한 위치였다.

 

폐궁의 나인들

 

폐궁에는 부리는 나인이 여럿 있었다. 강완숙 홍정호와 한날 서소문 밖에서 사약을 받아 죽은 강경복 수산나와, 죽음을 면하고 웅천(熊川)으로 귀양 간 서경의, 그리고 늙은 나인 이덕빈(李德彬)의 이름이 확인된다. 이 밖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나인 몇이 더 있었다.

 

「사학징의」 속 용호영 노파 김연이(金連伊) 율리아나의 공초 속에 강화도 죄인 집 나인 방으로 수놓은 베개를 찾으러 간 이야기가 나온다. 나인들이 용돈 마련을 위해 베갯모에 수를 놓았고, 이를 핑계로 천주교 신자들이 그 집을 들락거린 정황이 짐작된다.

 

신유박해 당시 주문모 신부는 다급한 상황에서 나인 서경의의 안내를 받아 폐궁에 숨어들었다. 3월 12일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고 나서 나인 서경의의 발고(發告)로 이 일이 알려지자 송씨와 신씨는 1801년 3월 17일에 즉각 사약을 받았다. 처음 사약이 내렸을 때 그녀들은 사약 마시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천주교 교리에서 그것이 자살죄에 해당해 십계명을 어기게 되므로 죽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들은 강제로 사약을 먹고 죽임을 당했다. 그녀들의 죽음 장면은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이루어져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나인 강경복도 서소문 밖 작은 집으로 끌려가 따로 사약을 받았다. 왕가와 관련된 사안이라 다른 죄수들과 격리한 것이다.

 

강화도에 유폐되어 있던 은언군 이인도, 그녀들이 주문모 신부를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 역모와 관련되어 있고, 이인 또한 이 음모의 주동자라 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6월 30일에 사약을 받고 48세의 나이로 배소에서 죽었다. 평생 그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던 정조가 급서한 지 1년 만에 대왕대비 정순왕후에 의해 집행된 일이었다.

 

그녀들의 천주교 관련 사건 기록들은 은언군의 손자로 훗날 보위에 오른 강화 도령 철종이 즉위한 뒤, 왕계의 불미스런 기록을 삭제하라는 순원왕후의 명에 따라 국가 기록에서 대부분 말소되었다. 「사학징의」에 폐궁의 나인이었던 강경복과 서경의의 공초만 남았고, 두 왕가 여인의 공초 기록이 빠지고 없는 이유다. 그밖에 「사학징의」 속 홍정호와 이조이 등 폐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공초 내용에 자주 얼버무리거나 뭉뚱그려 쓴 기술이 많이 보이는 것도 국가의 검열이 작동한 결과로 보인다.

 

은언군 이인의 부인 송씨 및 며느리 신씨는 천주교 신봉과 주문모 신부를 숨겼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다. 이인도 역모의 배후로 역시 사약을 받았다. 서학은 외래의 종교였고, 파급력이 대단했으므로, 종종 집권 세력에 의해 역모 또는 반역의 굴레가 씌워졌다. 그녀들은 진심을 다해 신앙을 지켰고, 신분을 잊고 교회 활동에 힘을 쏟았다. 왕가 차원의 기록 말살로 오늘날 그녀들의 신심마저 잊힌 것은 조금 슬픈 일이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