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 (18) 시인 신달자 엘리사벳 (하) 시인은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주님께 응답하는 삶 이어갈 것 가톨릭평화신문 2022.04.24 발행 [1659호]
▲ 1973년 신달자 시인의 첫 시집 출판 기념회에서 신달자 시인과 어머니 고 김복련씨. 출판 기념회에서 고 김복련 여사가 방명록에 남긴 글. ‘일생의 잇지 못할 날일세. 엄마에 기뿜이다’라는 글에서 딸을 향한 엄마의 마음이 느껴진다.
“제 인생엔 장마 폭우도 있었고 불난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잿더미 위에 피어나는 풀포기 같은 기운으로 살겠습니다. 천 개의 손과 눈(천수천안)의 가능성으로 열심히, 차분히, 성실히 살아가겠습니다.” 2020년 만해대상 수상자 신달자 시인의 답사다. 신달자 시인의 곱고 아름다운 모습에 무슨 풍파가 있겠냐 생각하지만 실제 시인의 삶은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한 달 만에 깨어난 남편은 몸을 가누지 못했다. 막내딸이 겨우 세 살일 때였는데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펜 대신 보따리를 집어 들고 동대문 시장을 오갔다. 그 와중에 그녀는 쓰러진 시어머니까지 병간호하며 마흔 살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펴낸 수필집 「백치애인」,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빚을 겨우 청산했다. 지나온 그의 삶은 본인 말대로 주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몇 년 전 신달자 시인께서 집을 축복해달라는 말씀에 성남시 심곡동에 새로 신축한 집을 방문했다. 신달자 시인은 세 딸과 함께 지은 그 집의 이름을 ‘고회지가(高會止家)’라고 붙였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임은 온 가족이 함께 모인 자리’라는 뜻이다. 이 집에는 시인과 딸 셋, 사위 셋, 손자 셋이 산다. 집 지을 때 조건은 딱 하나였는데 가족들의 사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네 가족이 한집에 살지만 출입문은 따로 있고 서로 간섭하지 않고 어디 가느냐, 뭐 하느냐 굳이 묻질 않는다고 한다. 보통 가족들은 어려서는 함께 살다가 독립해서 삶을 이어가는데 다시 모여서 사는 모습이 특별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저는 경남 거창에서 1남 6녀 중 다섯째 딸로 태어났어요.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는 딸을 공부시키기 위해 도시로 보냈어요. 당시에는 아들은 공부를 시켜도 딸은 잘 안 시켰어요. 버스 정류장에서 어머니는 세 가지 당부를 저에게 하셨던 것이 기억나요.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여자도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여자로서 행복해라.” 어머니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나에겐 가장 좋은 스승이었죠. 제가 뒤늦게 첫 시집을 냈을 때 어머니는 연습해온 빼뚤빼뚤한 글씨로 방명록을 남겼어요. ‘일생에 잊지 못할 날일세, 엄마의 기쁨이다.’ 그 글씨를 아직도 갖고 있어요. 나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을 때도 어머니는 나에게 늘 말했어요. “달자야! 그래도 니는 될끼다! 그래도 니는 될끼다”. 난 어머니의 그 말씀을 평생 지팡이 삼아 살았어요.
▶중고등학교 때 어떤 학생이었나요?
공부는 잘 못했어요.(웃음) 그러나 친구들을 잘 웃기고 수업 시간엔 질문이 많은 학생이었어요. 한마디로 명랑한 여학생이었어요. 그 시절이 제일 그립죠. 여고 3학년 때는 경남 백일장에서 1등을 하고 무시험으로 숙명여대 국문과에 들어가 4학년 때 ‘여상’ 여류신인문학상을 받으며 화려한 대학 생활을 끝냈어요. 그런데 그 이후 한 결혼은 불운했지요. 시어머니 병수발을 9년 동안 했는데 구십 살에 눈 감으셨어요. 남편도 24년간 심한 병고를 치렀어요. 그때 제가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었으니 고생은 말로 못 하죠.
▶결혼 후 작가로서의 삶을 이어갔나요?
숙명여대 4학년 때 등단했지만, 결혼하면서 문학은 내 삶에서 사라졌어요. 다행스럽게 박목월 선생님을 만나 1970년도 문학을 다시 시작했어요.
▶저는 책 살 돈이 없어 책방에 며칠간 가서 「물 위를 걷는 여자」를 서서 봤는데 재미있었어요. 소설도 많이 쓰셨나요?
우연히 쓰게 된 소설인 「백치애인」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독자가 많아졌어요. 이것도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전 생각해요. 그때 장편 소설을 3개 썼고 두 개가 영화와 드라마가 되었어요. 사실 그때 소설은 제게 밥줄이었습니다.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그냥 무대에 서고 싶었어요. 연예인 피가 흐르는지…. 어릴 때 유명한 여성 국극단이 오면 꽹과리랑 북을 치는데 어린 가슴이 무척 설레었어요. 저도 극단의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배우들이 있는 여관으로 가출한 적이 있는데 바로 엄마에게 머리끄덩이 잡혀 죽지 않도록 맞았어요.(웃음)
▶시인으로 최고 보람은 무엇인가요?
시인으로 등단했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사극을 보면 딸이 왕비에 오르면 아비가 큰절을 하던데 나도 네 앞에 큰절을 하고 싶다”라고 하셨어요. 시인을 왕비에 비유하셨지요. 아버지는 정신이 유랑객이었고 시인이 되고 싶은 분이었어요. 88세까지 일기를 쓰셨고 아버지 일기를 보면서 제가 문학의 길을 열었거든요. 보이지 않는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축복인 것 같아요.
▶손주, 자녀 같은 청년들에게 인생 조언이 있다면?
미국의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의 묘비명은 “남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이 여기 잠들다”예요. 전 손주들에게 “남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 되자”라고 쓴 액자를 벽에 걸어줬는데 잘 안 보더라고요. ‘마음’이란 보이지 않지만 인간 생애를 좌지우지합니다. 제가 시인이 된 것도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기 위해서였어요. 전 행복에 대해서 자주 말하는데 행복은 까다로운 것 같아요. 커피 한 잔에도 행복을 느끼지만 많은 걸 가져도 행복을 모르는 경우가 많잖아요. 작은 풀 하나도 자양분을 먹으며 자라는데, 희망도 풀과 같아서 개인적인 노력, 땀의 비료를 주지 않으면 시들고 말지요. 희망을 키워가는 것이 바로 행복 공부라 하고 싶어요.
▶인생의 좌우명이 있다면?
지금도 제 인생 계명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 명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부활로 이어가신 분이니까요.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요?
앞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지만 올해 팔순이고 지난 1월에는 큰 수술도 했어요. 제가 한 정진석 추기경님 마지막 인터뷰에서 추기경님은 “생애 중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넘었는데 하느님이 살아남게 한 것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자주 생각해요. 저도 ‘아직 삶을 살고 있다면 어떤 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무엇일까’ 하고 사는 그 날까지 매일 같이 생각하고 실천하려 합니다.
허영엽 신부 /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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