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숲에 혼자 가봐야 하는 이유 (3) 숲은 우리의 성장 통로 가톨릭평화신문 2022.05.29 발행 [1664호]
내게 가장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숲과 함께 있는 시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도 여럿이 아니고 혼자 숲에 있을 때이다. 숲에는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가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찾는 것도 좋다. 현대인들은 살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그래서 혼자 있기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자 있더라도 전화나 인터넷의 연결로 끊임없이 혼자이기를 거부한다.
지난 주말 동네 뒷산인 구룡산을 혼자서 걸었다. 숲길에 들어선 순간 어떤 향수도 흉내 내지 못할 향긋함이 코를 통해 온몸으로 퍼지고, 아름다운 꽃들과 녹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이런 자연의 환경을 천국으로 묘사하는 이유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요즘의 숲은 또한 새들의 노래자랑이 펼쳐지는 무대이다. 이 무렵의 새들은 먼동이 틀 때면 부지런히 나와 쉴 새 없이 재잘댄다. 조류학자들은 새벽에 재잘거리는 시간이 종류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빛의 강도에 따라 새들이 노래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귀에는 때로는 아름다운 소리로 또 때로는 처량한 듯한 소리로 들리는 새들의 재잘대는 소리는 다른 새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또 자신을 능력을 나타내고 과시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숲에 홀로 가는 이유는 이런 모든 환경을 오롯이 느끼고 같이 동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상이 머릿속을 비우고 현재의 나에 집중하는 과정이라면 숲에서는 따로 명상이 필요 없다. 빰을 스치는 바람 한 줄기, 눈앞에 살랑이는 나뭇잎,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 이런 숲의 요소들이 나를 집중시키고, 둔감해졌던 나의 오감을 되살리며, 온갖 잡념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을 깨끗이 청소해 준다. 그래서 나는 혼자만의 숲 여행이 좋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미국 아이다호대학에서 안식년을 지낼 때 아주 뜻깊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 대학의 원생지연구소에서 실시한 ‘비젼 퀘스트’란 프로그램인데 홀로 숲에서 일주일간을 지내는 활동이었다. 이 ‘비젼 퀘스트’는 원래 북미 원주민 부족에서 수행했던 성인 의식이었는데, 이 부족은 구성원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혼자 숲으로 들어가 지내며 자연과 지신들의 신과 교감하며 계시를 받고 마을로 돌아와 새로운 이름과 직업을 가졌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모든 가식을 자연으로 씻어버리고 진정한 자신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경험에서 숲 속에서 혼자의 두려움, 공포, 그리고 지루함도 느꼈지만, 자연의 진리와 지혜를 배우고 결국 인생을 깨닫게 된 경험을 얻었다. 더 깊은 나를 발견하고 또 인생의 목표를 명확하게 하는 값진 경험이었다.
핀란드의 국민 영웅인 작곡가 시벨리우스는 숲에서 얻은 영감으로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특히, 그의 ‘전원교향곡’은 핀란드 숲의 풍경과 향취를 절묘하게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숲은 이렇게 위대한 예술가, 철학가, 그리고 성인들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영감을 얻으며 인류의 보물 같은 작품과 사상을 남기는 모태가 되었다. 언젠가 핀란드의 국립공원에서 아름다운 숲 속의 집이 있어 공원 관리인에게 누가 사는 집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집은 예술가들을 위해 무료로 살게 하고 숲과 자연에서 창조적인 영감을 얻게 하여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했다. 핀란드의 문화 수준을 다시금 느꼈던 기억이 있다.
학기 초가 되면 나는 학생들에게 주는 숙제가 있다. 캠퍼스 근처의 숲에 포근한 안식처를 찾아 나무와도 대화를 하고 자연과 교감을 해 보라고 한다. 처음엔 장난처럼 이 숙제를 받아들이다가도 어느 순간 많은 위안과 자신을 돌아보고 깨우침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숲은 이렇게 우리를 성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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