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향미 시인 / 발바닥 경전
늦은 퇴근길 지하철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발을 본다 빨간 메니큐어 마른 하얀 발 옹이 많은 내 발바닥이 부끄러워 슬며시 감추고 싶다 앞만 보고 걸어 온 걸음에 제동을 걸고 싶다
엄지발가락처럼 삐뚤어질 테야 무지외반의 아우성이 들린다 기껏해야 바닥, 발바닥 때문에 어루만지지 못했던 직립의 시간에 통점이 잡힌다
발자국에 울음까지 가두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첫울음 터트린 아이의 발에 잉크를 묻혀 탁본할 때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 축복을 기원하며 울음의 가장 깊은 곳이 바닥이라는 것 몰랐다
가만히 발바닥을 쓸어보며 티눈 박힌 생이라니 돌보지 못한 바닥의 혈 자리를 짚어 본다 아프다 아프다 바닥에 누운 지압점이 함께 울어주는 밤이다
- 2013년 <시와 정신> 가을호
천향미 시인 / 마른 장마
나의 전생, 달팽이 시절 무척추의 몸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일 언제나 목이 말랐다 가까이 오지마, 각을 세워도 모서리를 만들지 못한 무딘 더듬이 허공을 저었다 끈끈한 체액으로 온몸 감싸고 습지를 고집했던 그늘의 시간 더듬거리며 찾아 나선 눈(眼) 속의 물길 투명한 바람이 길잡이 되어 느린 걸음을 부축했다 안간 힘으로 그려보던 꿈속의 지도 울퉁불퉁한 길이 달팽이를 끌고 갔다 정오의 햇살이 만들어내는 신기루 한 쌍 사막을 건너 중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건기를 견디는 달팽이의 눈 먼 여정
- 2013년 <시에티카> 하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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