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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란 시인 / 눈물의 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31.

김정란 시인 / 눈물의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서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 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 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내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 보면

그 방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김정란 시인 /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네 망설임이 먼 강물소리처럼 건네왔다

네 참음도

네가 겸손하게

삶의 번잡함 쪽으로 돌아서서 모르는 체하는 그리움도

 

가을바람 불고 석양녘 천사들이 네 이마에

가만히 올려놓고 가는 투명한 오렌지빛

그림자도

 

그 그림자를 슬프게 고개 숙이고

뒤돌아서서 만져보는 네 쓸쓸한 뒷모습도

 

밤새

네 방 창가에 내 방 창가에

내리는, 내리는, 차갑고 투명한 비도

 

내가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한번, 내 이름으로,

 

너는 늘 그렇게 내게 있다

세계의 끝에서 서성이는

아득히 미처 다 마치지 못한 말로

 

네게 시간을 줘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쓴다, 내 가슴 빈터에

 

세계가 기웃, 들여다보고 제 갈 길로 가는

작은, 후미진 구석

 

그곳에서 기다림을 완성하려고

지금, 여기에서, 네 망설임을, 침묵을, 거기에 심는다,

한번 더, 네 이름으로,

 

언제든 온전히 말을 거두리라

 

너의 이름으로, 네가 된 나의 이름으로

 

 


 

김정란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평론가, 번역가.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 III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03년부터 상지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로 활동. 1976년 김춘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를 선보임. 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 『매혹, 혹은 겹침』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스·타·카·토· 내 영혼』 등. 평론집 『비어 있는 중심-미완의 시학』, 사회 문화 에세이집 『거품 아래로 깊이』 등을 펴냄. 1998년 백상출판문화상(번역부문) 수상. 2000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현재 상지대 인문사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