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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길상호 시인 / 목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8.

길상호 시인 / 목욕

 

 

옷을 다 벗었는데

박박 문지르니 다시

먼지의 옷이 벗겨진다

살비듬 옷이 벗겨진다

주름투성이 구겨진

헐렁한 옷만 남는다

이 옷을 벗기는 데

또 얼마나 걸릴까

여기저기 상처로 덧대

살아온 바느질 자국

수련처럼 물을 맞대고 살면

스르르 풀릴 실밥인데

마무리해둔 실 끝을 찾아

오늘도 배꼽만 긁는다

물기 젖은 창 뒤에 숨어

나를 훔쳐보던 감나무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어둠 속에 숨는다

벗어둔 낙엽이 한 장

유리창에 걸려 있다

 

 


 

 

길상호 시인 / 수전증

 

 

 나무를 켠 적이 있습니다, 벼락을 맞은 후 이따금 음산한 노래를 흘리곤 하던 감나무였는데요, 톱질이 사라진 음악을 재생시키는 주술이라는 걸 그때 알았지요, 톱이 닿자 나무에게 입이 생기고, 톱밥 같은 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나이테에 감겨있던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라고는 했지만 듣기에 따라 만신이 중얼거리는 내세의 방언 같기도 했습니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두렵긴 했지만, 그래도 순식간에 속을 태워버린, 죽음에 감전된 그 가락은 거부할 수 없었지요, 어떤 음절은 너무 딱딱해서 톱니가 몇 개 부러지고, 손바닥엔 가묘처럼 물집이 부풀었습니다, 나무가 겨우 속을 드러냈을 때 단면엔 검은 무늬 하나가 단단하게 박혀 있었는데요, 어찌 보면 새처럼도, 또 어찌 보면 사람처럼도 보였습니다, 아픈 손으로 몇 번 쓸어주고 나서야 나무의 노래가 겨우 멎었는데요, 어쩐 일인지 톱날의 떨림은 아직 손끝에 남아 사라지지 않네요.

 

 


 

길상호 시인

197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와 『모르는 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우리의 죄는 야옹』 외. 사진에세이 『한 사람을 건너왔다』가 있음. 2004년 현대시동인상, 천상병 시상, 김달진 젊은시인상, 김종삼 시문학상 등 수상. 2004년 '현대시동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