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호 시인 / 목욕
옷을 다 벗었는데 박박 문지르니 다시 먼지의 옷이 벗겨진다 살비듬 옷이 벗겨진다 주름투성이 구겨진 헐렁한 옷만 남는다 이 옷을 벗기는 데 또 얼마나 걸릴까 여기저기 상처로 덧대 살아온 바느질 자국 수련처럼 물을 맞대고 살면 스르르 풀릴 실밥인데 마무리해둔 실 끝을 찾아 오늘도 배꼽만 긁는다 물기 젖은 창 뒤에 숨어 나를 훔쳐보던 감나무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어둠 속에 숨는다 벗어둔 낙엽이 한 장 유리창에 걸려 있다
길상호 시인 / 수전증
나무를 켠 적이 있습니다, 벼락을 맞은 후 이따금 음산한 노래를 흘리곤 하던 감나무였는데요, 톱질이 사라진 음악을 재생시키는 주술이라는 걸 그때 알았지요, 톱이 닿자 나무에게 입이 생기고, 톱밥 같은 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나이테에 감겨있던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라고는 했지만 듣기에 따라 만신이 중얼거리는 내세의 방언 같기도 했습니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두렵긴 했지만, 그래도 순식간에 속을 태워버린, 죽음에 감전된 그 가락은 거부할 수 없었지요, 어떤 음절은 너무 딱딱해서 톱니가 몇 개 부러지고, 손바닥엔 가묘처럼 물집이 부풀었습니다, 나무가 겨우 속을 드러냈을 때 단면엔 검은 무늬 하나가 단단하게 박혀 있었는데요, 어찌 보면 새처럼도, 또 어찌 보면 사람처럼도 보였습니다, 아픈 손으로 몇 번 쓸어주고 나서야 나무의 노래가 겨우 멎었는데요, 어쩐 일인지 톱날의 떨림은 아직 손끝에 남아 사라지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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