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휘 시인 / 첫사랑
사과꽃 그늘이었습니다 열어놓은 서랍 속같이 다정했습니다 꼭 다시 오자고 풍경은 자물쇠로 잠그고 비밀번호 네 자리를 걸었습니다. 꽃 핀 과수원을 함께 걸어 나오며 잊지 말아야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다가 잠에서 깼습니다 네 자리 약속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캄캄한 새벽이었습니다 봄날은 오늘을 열어주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풍경에서 하루만큼 더 멀리 나는 걸어갈 것입니다 돌아보아도 꿈속의 서랍은 열 수가 없으니 사방은 오늘뿐일 것입니다
심재휘 시인 / 기적
병실 창밖의 먼 노을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저녁이 되니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네 그후로 노을이 몇 번 더 졌을 뿐인데 나는 그의 이른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루하루가 거푸집으로 찍어내는 것 같아도 눈물로 기운 상복의 늘어진 주머니 속에는 불씨를 살리듯 후후 불어볼 노을이 있어서 나는 그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술집을 지나 닭갈비 타는 냄새를 지나 그의 사라진 말들을 지나 집으로 간다 집집마다 불이 들어오고 점자를 읽듯 아직 불빛을 만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한집으로 모여든다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중에서
심재휘 시인 / 속초
내 어릴 때 아버지 직장이 속초여서 강릉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오고는 했다 그 바다의 해안선은 오늘도 곧은데 먼 수평선이 둥근 것은 파도가 치는 동안은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것이겠다 바다는 그런 것이겠다
파도가 다 같은 소리를 내는 것 같아도 내 앞에서만 나는 소리였다 앓는 소리였다 바닷가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들 앞의 파도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지독하게도 너른 해변이었는데 나눌 수 없는 파도 소리였다 모래에 묻힌 발목들이 가련했다
고개를 돌리면 저 멀리 오른쪽 해변에서 아이와 노는 젊은 부부 까마득한 그곳에서 시작하는 수평선은 휘는 듯 빠르게 휘익 내 눈앞을 가로질러 왼쪽 바다 끝 너머로 가신 아버지 천천히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보이는 바다는 무덤처럼 반만 둥글게 파도 소리를 내는 바다는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있어서 눈뜨고 보라는 것이겠다 겨울 바다였고 북쪽이었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유미 시인 / 아버지의 못 외 1편 (0) | 2022.11.18 |
---|---|
권운지 시인 / 갈라파고스 외 1편 (0) | 2022.11.18 |
박영기 시인 / 운다 외 1편 (0) | 2022.11.18 |
황수아 시인 / 바람의 깊이 외 1편 (0) | 2022.11.18 |
김두안 시인 / 유도의 꿈 외 1편 (0) | 2022.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