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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수현 시인(안성) / 빈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0.

임수현 시인(안성) / 빈방

 

 

그 분의 그 분의 살이 섞인

흙으로 벽을 바른 집

길가에 꽂힌 벼룩시장 몇 장 초배

지로 바른 위에

목단일까 장미일까 커다란 꽃잎을

겹쳐 바르고

동쪽을 향한 격자무늬 창에 프랑스

자수

얼기설기 놓여진 커튼 내리고 지나

간 계절

서리 국화 향기 허공을 지날 때엔

갓 볶아낸

콜롬비아 게이샤 향으로

아침을 열었지

 

영혼을 씻은 바람 돌아나간 흔적만 남은 채

살래살래 흔드는 인사도 사라지고

차갑게 식어버린 부스러기 별들만 쏟아지니 색 바랜

꽃잎들

툭툭 떨어지는데

고요하게 침체된 생각은 삭을대로 삭아버려

바닥에 철퍼덕 늘어졌다

 

초배지 위에 주저앉던 날부터 퇴색을 시작한

꽃무늬 벽지에 빨간 립스틱 흔적을 남기는

버릇이 생겼지

언제나 마음은 하나라고 썼던 편지는 비름박에

부딪혀 먼지만 풀썩이는데

 

 


 

 

임수현 시인(안성) / 종자

 

 

서귀포 친구에게

쪽파 씨 내는 법을 알려주었다

 

바닥에 드러누운 쪽파는 죽은 게 아니고

알을 품었다고

바다 달려 온 바람과 해를 보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늘을 날아서 파 씨가

나의 텃밭에 묻혔다

 

언 땅에서 송곳니처럼 봄을 밀고 나와

뽑아 먹고 데쳐 먹고

살았던 자리조차 무너져버린 무덤

 

호미의 달구질에 토실하게 영근 갯내를 토한다

 

그의 고향은 바다였을까

아니

바다에 가기 전 어느 뒷밭에 들렀을지도

 

입 다물고 누워버린 파 씨에

고향도 묻지 말라는 탱고 음악이 흐른다

 

 


 

임수현 시인(안성)

경기도 안성 출생. 시사모ㆍ한국디카시인모임 동인. 첫 시집 <너는 내 봄이다> 출간. 시사모 동인시집 <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초록의 뒷면을 지나>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