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장이지 시인 / 사랑의 폐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3.

장이지 시인 / 사랑의 폐광

 

 

1

 

당신에게 쓰는 시는 언제나 나를 다치게 하네 쓰면 쓸수록 나는 죽음에 다가가네

수많은 통점으로 뒤덮인 글쓰기, 편지, 당신에게 쓰는 시…… 나의 수많은 기절!

 

2

 

당신에게 쓰던 이메일은 유령처럼 사라지고, 나는 특별한 질감의 엽서에 당신 이름을 새로 적네

당신 이름이 새겨진 몸이, 우표도 붙이지 않은 엽서가 내 앞에 있네

입 벌린 상처들에는 혀가 없고 출산이 없고 묻혔던 보석이 없고

이 방에는 지금 유령들뿐, 지우개를 들고 있는 유령과 미래의 유령들⸺ 쓰게 될 편지와 쓰지 못할 편지들의, 그리고

 

3

 

사랑의 폐광에서 내가 채굴한 당신 이름, 날카로운 펜으로 새긴 문신

나의 첫 줄, 첫 줄이자 마지막 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검지로 문질러 보네

아, 익숙해지지 않는 질감의 고통

 

 


 

 

장이지 시인 / 구원(久遠) 2-묵화(墨畵)

 

 

검은 바다가 누워 있고

목이 잘린 새가

바다보다 낮은 해변에서 꿈을 꾼다.

백사장에 찢어진 깃발이 펄럭이고

하늘엔 부서진 비행기가 둥둥 떠간다.

거대한 붓이 바다의 묵(墨)을 찍는다.

검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노파가

등신대의 붓으로

해변에 한 글자를 쓰는 동안

백야의 꿈이 검은 파도에 젖는다.

위안부 할머니 얼굴에 파인

주름살이 파도처럼 계속 밀려온다.

해동갑도 못하는 어린 새가

조개를 얻어먹으러 왔다가

찌…… 찌…… 소리를 남기고 가버린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게들이

새까맣게 바다로 달려간다.

백사장에 쓴 글씨가

무형의 미친 바람이 되어

방풍림의 검은 신발 위로

사라지는 동안

하얀 연꽃이 바다 위로 솟아오른다.

연꽃이 열리자

검은 먹물에 휘감긴

어두운 꿈이 알몸을 드러낸다.

혼을 물고 게들이 나락(奈落)으로 사라진다.

위안부 할머니가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얼굴은 이미 바람이 되고

등만 남아서 나락 쪽을 보고 있다.

 

 


 

장이지 시인

1976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및 同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라플란드 우체국』 『레몬옐로』 『해저의 교실에서 소년은 흰 달을 본다』가 있음. 제4회 바움젊은시인상(2012), 제7회 오장환 문학상 수상. 현재 성공회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등에 출강.  ‘불편’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