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예영 시인 / P군에게 - 멸종 세대를 위한 그루브 2
시간의 중심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 검은 아가리 속 무섭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본 적이 있다. 중심으로 떨어지는 별들의 아우성 검은 혀로 순식간에 우주를 빨아들이던 시간의 중심은 고요하고 고요하고
너무 거침없는 너무 아름다운 너무 광활한 것 앞에서 이제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어.
그것은 양팔을 벌려 가슴을 열어 갈빗대를 빗장처럼 열었다. 그 안에서 오래된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고 소용돌이가 물보라가 모래먼지가 한데 뒤섞여 꼬리 긴 새가 되었지. 그 앞에서 나는 그만 얼굴을 붉혀버렸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 P군.
이제 내 안에는 옹기항아리의 커다란 아가리처럼 단단하고 막막한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어. 시간도 바람도 사람도 모두 흘려보내는, 그야말로 공사장의 폐파이프 같은 것, 그런 것이 되어버렸지.
어서 늙어라 어서 늙어라
기도가 불가능을 구하는 거라면 나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었던 것.
P군, 이곳엔 그 무시무시하다는 지금이 왔는데. 그런데 나는 갈 곳이 없어.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 P군,
유일하게 멀쩡했던 인간 P군, 짧게 말해 우리가 사랑했던 P군, 그곳은 안녕하신가? 아직도 멀쩡하신가?
윤예영 시인 / 치자꽃 피는 계절
그리하여 여름이 가고 있었다 마을의 경계에는 굵은 치자꽃이 송이송이 매달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끝에선 죽은 매미가 바스락거렸다 온 마을이 치자꽃 향내에 잠기면 사람들은 탕탕 창을 닫았다 불길한 소식이었다 향기가 농익어 문드러지더라도 그것은 오지 않을 터였다 민소매 아래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여름이 가고 있었다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꽃송이들이 발치에 쌓이고 있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성남 시인 / 포자의 시간 외 1편 (0) | 2022.12.04 |
---|---|
이은유 시인 / 몹쓸 연애 외 1편 (0) | 2022.12.04 |
최지하 시인 / 포토그래피 외 1편 (0) | 2022.12.04 |
김남호 시인 / 줄넘기 외 1편 (0) | 2022.12.04 |
조혜은 시인 / 모래놀이 외 1편 (0) | 2022.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