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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신 김대건·최양업 전] (57) 사목자 최양업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30.

[신 김대건·최양업 전] (57) 사목자 최양업

사목에 뛰어든 최양업, 6개월간 3800여 명 만나 성사 베풀어

가톨릭평화신문 2022.07.24 발행 [1672호]

 

 

 

 

페레올 주교와 6년 만에 재회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중병을 앓고 있는 다블뤼 신부를 찾아가 병자성사를 준 후 충청도 교우촌에 머물고 있던 페레올 주교를 찾아갔다. 아마도 페레올 주교가 1846년 김대건 신부와 조선 신자 8명이 순교한 이후 병오박해를 피해 숨어지냈던 수리치골이었을 것이다. 둘의 만남은 1844년 중국 소팔가자에서 헤어진 후 6년 만의 상봉이었다. 당시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ㆍ김대건 신학생에게 부제품을 준 후 김대건과 함께 조선 입국 길에 나섰기에 최양업과 헤어졌다. 둘은 그간 있었던 일에 관해 풀어놓을 이야기보따리가 얼마나 많았는지 하루 동안 담소했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도앙골 교우촌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 참조)

 

페레올 주교는 이날의 기쁨을 이렇게 적고 있다. “토마스 신부가 무사히 입국했습니다. 최양업 신부가 고국 땅을 밟던 그때에 다블뤼 신부는 이 대목구의 어느 외진 곳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 신부가 먼저 한 일은 다블뤼 신부에게 달려가 병자성사를 베풀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병에서 회복됐으나, 몸이 약한 동료 다블뤼 신부는 성사를 베풀기 위한 교우촌 방문을 감당하기 어려워, 몇 명의 예비 신학생을 돌보고 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제가 무거운 짐을 다 짊어져야 했을 텐데, 최 신부의 입국으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지 신부님도 잘 짐작하실 것입니다.”(페레올 주교가 1850년 11월 17일 조선에서 홍콩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쓴 편지)

 

하지만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의 상봉의 기쁨만큼 애통해 했다. 페레올 주교도 다블뤼 신부와 똑같이 열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두 선교사 모두 병중에 있는 것을 확인한 최양업 신부는 이 땅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의 막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과로와 굶주림, 풍토병에 시달리다

 

조선의 선교사들은 늘 과로와 병에 시달렸다. 조선에서의 선교사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글을 상기해 보자. 박해 시대 선교사들의 사목 활동이 거의 같은 형태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나는 몹시 지쳤고 크나큰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납니다. 3시에는 집안사람들을 불러 기도를 드리고, 3시 30분에는 예비신자가 있는 경우에 세례성사를 주고, 혹은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것으로 성무 집행이 시작됩니다. 그다음에는 미사를 봉헌하고 감사의 기도가 따릅니다. 성사를 받은 교우 15~20명이 해 뜨기 전에 돌아갑니다. 낮 동안에도 대략 그만한 인원이 한 명씩 들어와서 고해성사를 받고 이튿날 새벽 영성체를 한 다음에야 나갑니다. 나는 한 집에서 이틀밖에 머물지 않으며, 해 뜨기 전에 다른 집으로 옮겨갑니다. 나는 시장기 때문에 고통을 많이 당합니다. 왜냐하면,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서 정오까지 기다려야 영양 가치도 별로 없는 맛없고 양도 많지 않은 식사를 하는데, 춥고 건조한 기후인지라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점심을 먹은 후 조금 쉬고 나서 어른 학생들에게 신학 강의를 하고, 또 밤이 될 때까지 몇 사람의 고백을 듣습니다. 밤 9시에는 흙바닥에 돗자리와 타타르 양털로 짠 융단을 깔고 잡니다. 조선에는 침대도 매트리스도 없습니다. 나는 항상 허약하고 병든 몸으로 힘들고 매우 바쁜 생활을 해왔습니다.”(앵베르 주교가 1839년 3월 30일 마카오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

 

페레올 주교도 “주님께서 저희만이 이 나라에서 일과 피로로 차츰차츰 쇠약해져 죽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페레올 주교가 1849년 12월 30일 자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바랑 신부에게 쓴 편지)라고 반문할 만큼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건강을 위협한 것은 과중한 업무뿐 아니라 음식과 풍토병이었다. 다블뤼 신부는 한식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음식”이라고 했다. 이 익숙해질 수 없는 한식에 대해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쌀, 고추, 생선 절임 약간,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조선인과 선교사들의 일상 음식입니다. 조선에는 채소가 중국식 배추밖에 없습니다. 조선에서도 질경이 잎이나 고사리 잎을 많이 먹지만 이것을 채소라고 하지 않습니다. 서울에는 쇠고기가 부족하지 않으나, 지방에서는 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일상 음료는 쌀 끓인 물(숭늉)을 마십니다. 이런 절식은 대단히 힘듭니다. 특히 신임 선교사들에게는 그러합니다. 올해 기적적으로 도착한 페롱 신부는 얼마 전에 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조선 선교사들에 비하면 트라피스트회 수사들은 식도락가(향락가)라고 했습니다. 그도 이 울트라 트라피스트적인 절식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곧 이에 적응할 것입니다.”(베르뇌 주교가 1857년 9월 15일 앙리 드 라 부이으리 남작에게 쓴 편지)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조선에서 활동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21명 가운데 브뤼기에르ㆍ페레올 주교와 메스트르ㆍ장수ㆍ랑드르ㆍ조안노 신부 등 6명의 사제가 병사했다.

 

죽음의 그림자

 

한편, 중병을 앓고 있는 조선의 두 선교사와 만난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상봉한 다음 날부터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사목 일선에 뛰어들었다. 최 신부는 전라도부터 시작해 6개월간 쉬지 않고 교우촌을 사목 방문했다. 이 기간에 그는 전라ㆍ경상ㆍ충청ㆍ경기ㆍ강원 등 5개 도를 돌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예비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입교시켰다. 그는 이 기간에 신자 3815명을 만나 2401명에게 고해성사를 줬다. 또 1764명에게 성체성사를, 어른 181명ㆍ유아 94명ㆍ보례자 316명에게 세례성사를 베풀었다. 그리고 죽어가는 외교인 아기 455명에게 대세를 줬다.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000리(약 2000㎞)를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이처럼 긴 여행과 이 모든 고된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은 늘 좋았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자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최 신부는 첫 사목 방문 시기인 이때 두 차례나 큰 곤욕을 치렀다. 한 번은 외교인 가족과 사는 여교우 3명에게 성사를 주러 갔을 때였다. 마을에 들어갔다가 주민들이 최 신부를 서양 선교사로 오해하고 이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장은 마을의 모든 연장자를 소집해 최 신부 일행을 잡아 죽일 방도를 논의했다. 온 마을이 최 신부가 들어간 교우 집을 감시하고 있어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 아래로 달려들고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외교인들의 고함에 조금도 개의치 않은 체하면서 밤새도록 저들이 쳐들어오는 것만을 대비하고,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우리가 아침에 그 마을을 떠나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또 한 번은 200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있는 마을에 머물 때였다.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있었는데 사흘째 되던 날 들통이 났다. 이장과 마을 주민들은 최 신부가 있는 집으로 달려와 점심때부터 밤중까지 욕설과 저주, 협박, 공갈을 퍼부었다. 주민들은 최 신부에게 “네가 어디 견딜 수 있나 보자. 너는 내일 붉은 오랏줄에 꽁꽁 묶여 도둑놈들의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소리치다 제풀에 지쳐 흩어졌다. “저는 공소 회장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밤중에 일어나서 날이 새기 전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전날에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 준비를 한 이들이 미사를 간절히 기대했는데도 저는 미사도 드리지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성사를 받지 못한 다른 신자들은 다음 날 저를 뒤좇아 100리(40㎞)나 되는 험준한 길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우촌까지 와서 성사를 받았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박해와 죽음의 위협은 벗처럼 늘 최양업 신부를 따라다녔다. 그는 수난과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때마다 안도하지 않고, 그 와중에도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마음과 정성을 모아 감사를 드렸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