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하 시인 / 밤과 꿈
몸통에서 목이 쑥 빠져나온 것 같다 얼굴은 육체의 덤인 것 같다 혹인 것 같다 부록인 것 같다 어떤 부록은 본문보다 길고
어깨에서 팔이 쑥 빠져나오고 손목에서 손가락들이 새털처럼 찢어지고 가늘게 떨면서
어둠을 털면서 온몸을 기울여 총채를 들고 있다 팔 하나가 인생보다 길고
긴 팔이 짧은 팔을 끌면서 하루를 빠져나가는 밤 열두 시의 시곗바늘이다
성실한 노동이 연약한 허기를 안고 떠도는 한 쌍의 모녀다 어린 내가 울면 일하던 내가 달려가 흰밥을 짓는다 끊을 수 없는 연대다
옆구리를 찌르며 지나가는 입을 털고 두 귀에 묻으면 한 사람의 비밀은 독재자의 나라보다 길고
아름다운 트로피를 몰래 닦다가 깨뜨린 하녀처럼 어둠의 구석구석 무릎을 꿇을게 네 방을 보여줄래?
반짝반짝 부서진 너를 훔칠 수 있다면 종이비행기처럼 접을 수 있다면 텅 빈 에이프런은 지구보다 길고
바람의 항아리가 깨져서 새들은 흩날리고 검은 하늘에 박힌 것들은 내 눈이 닿기 전에 깨져버린 우주의 파편인데
거기서도 누군가 총채를 들고 있는 것 같다 깊숙이 과거를 털다가 손이 닿지 않아서 손톱을 길렀다 번개처럼
허공을 할퀴며 지나가는 마음을 털었다 차갑고 축축한 모퉁이에 서서 밤의 키스는 죽음보다 길고
이민하 시인 / 엑스트라가 주인공인 영화의 엑스트라들
우리는 누운 자세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말을 하면 안 된다 딸꾹질도 안 된다
쓰러지면서 최선을 다해 마주 누웠다 눈빛에 눈빛을 더하면서
한쪽 눈을 찡긋하면 반갑다는 거고 동공이 자꾸 흔들리면 불안과 초조 두 눈을 깊이 감고 있으면, 오늘도 무사히!
이런 것쯤은 정하지 않고도 가능해서 우리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감정보다는 스웨터! 같은 것 영혼보다는 크림빵! 같은 것 결국엔 말에 가까워져서
눈을 오므리면: 너무 춥지 않아? 눈알을 빙빙 돌리면: 잠 못 자서 어지러워 흰자위를 납작 뒤집으면: 나도 배고파
그러나 꼬르륵거리면 들켜버리고 들키고 나면 이 바닥에서도 쫓겨나니까
우리는 누운 자세로 숨을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잠을 자면 안 된다 하품도 안 된다
반질반질 네 귀퉁이가 닳은 대본처럼 타인의 대사에 죽죽 그은 밑줄처럼
밤이 이어지고 비가 뿌려지고
눈 깜박깜박: 오늘은 시체들이 꾸는 꿈 같아 눈 깜-박: 꼭 진짜 같지 않니? 눈 깜박 깜박 깜박: 그래, 마술 같구나
이렇게 리얼한 날에는 죽음도 속일 수 있어서
침묵을 암기하고 침묵을 재해석하고 침묵이 침묵을 속여가면서
우리는 무사히 퇴장할 때까지 끝내 살아 있었다 죽음에 죽음을 더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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