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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민하 시인 / 밤과 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16.

이민하 시인 / 밤과 꿈

 

 

몸통에서 목이 쑥 빠져나온 것 같다

얼굴은 육체의 덤인 것 같다 혹인 것 같다 부록인 것 같다

어떤 부록은 본문보다 길고

 

어깨에서 팔이 쑥 빠져나오고

손목에서 손가락들이 새털처럼 찢어지고

가늘게 떨면서

 

어둠을 털면서

온몸을 기울여 총채를 들고 있다

팔 하나가 인생보다 길고

 

긴 팔이 짧은 팔을 끌면서 하루를 빠져나가는

밤 열두 시의 시곗바늘이다

 

성실한 노동이 연약한 허기를 안고 떠도는

한 쌍의 모녀다

어린 내가 울면 일하던 내가 달려가 흰밥을 짓는다

끊을 수 없는 연대다

 

옆구리를 찌르며 지나가는 입을 털고

두 귀에 묻으면

한 사람의 비밀은 독재자의 나라보다 길고

 

아름다운 트로피를 몰래 닦다가 깨뜨린 하녀처럼

어둠의 구석구석 무릎을 꿇을게

네 방을 보여줄래?

 

반짝반짝 부서진 너를 훔칠 수 있다면

종이비행기처럼 접을 수 있다면

텅 빈 에이프런은 지구보다 길고

 

바람의 항아리가 깨져서 새들은 흩날리고

검은 하늘에 박힌 것들은 내 눈이 닿기 전에 깨져버린 우주의 파편인데

 

거기서도 누군가 총채를 들고 있는 것 같다

깊숙이 과거를 털다가

손이 닿지 않아서

손톱을 길렀다 번개처럼

 

허공을 할퀴며 지나가는 마음을 털었다

차갑고 축축한 모퉁이에 서서

밤의 키스는 죽음보다 길고

 

 


 

 

이민하 시인 / 엑스트라가 주인공인 영화의 엑스트라들

 

 

우리는 누운 자세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말을 하면 안 된다

딸꾹질도 안 된다

 

쓰러지면서 최선을 다해 마주 누웠다

눈빛에 눈빛을 더하면서

 

한쪽 눈을 찡긋하면 반갑다는 거고

동공이 자꾸 흔들리면 불안과 초조

두 눈을 깊이 감고 있으면, 오늘도 무사히!

 

이런 것쯤은 정하지 않고도 가능해서

우리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감정보다는 스웨터! 같은 것

영혼보다는 크림빵! 같은 것

결국엔 말에 가까워져서

 

눈을 오므리면: 너무 춥지 않아?

눈알을 빙빙 돌리면: 잠 못 자서 어지러워

흰자위를 납작 뒤집으면: 나도 배고파

 

그러나 꼬르륵거리면 들켜버리고

들키고 나면 이 바닥에서도 쫓겨나니까

 

우리는 누운 자세로 숨을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잠을 자면 안 된다

하품도 안 된다

 

반질반질 네 귀퉁이가 닳은 대본처럼

타인의 대사에 죽죽 그은 밑줄처럼

 

밤이 이어지고

비가 뿌려지고

 

눈 깜박깜박: 오늘은 시체들이 꾸는 꿈 같아

눈 깜-박: 꼭 진짜 같지 않니?

눈 깜박 깜박 깜박: 그래, 마술 같구나

 

이렇게 리얼한 날에는 죽음도 속일 수 있어서

 

침묵을 암기하고

침묵을 재해석하고

침묵이 침묵을 속여가면서

 

우리는 무사히 퇴장할 때까지

끝내 살아 있었다

죽음에 죽음을 더하면서

 

 


 

이민하 시인

1967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 2000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환상수족』(열림원, 2005), 『음악처럼 스캔들처럼』(문학과지성사, 2008), 『모조 숲』(민음사, 2012), 『세상의 모든 비밀』(문학과지성사, 2015) 등이 있음. 2012년 제13회 현대시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