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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도봉 시인 / 자드락길 볕뉘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21.

김도봉 시인 / 자드락길 볕뉘

 

 

자드락길 볕뉘는 아직도 안녕하다

 

잊은 듯 가끔 색 바랜 일기장을 찾아 펼치면

몽당연필에 침 발라 쓴

입 삐뚤어진 글씨들이 빼곡히

압화처럼 눌려 있다

 

태풍 사라호가 그 먼 데로 떠밀고 간 황토 교실

넘실대던 흙탕물 속에서 망연히

하늘만 쳐다보다가

집 없는 집을 찾아 발걸음 옮겨야 했던

자드락길

 

볕뉘 쪼잔 했던 그 길 그 담장을 따라

노오란 탱자가 오종종

감싸 안은 마을

앞마당 한 켠에는 앉은뱅이 채송화가 그림자 한 뼘

차지하고 있었다

 

조붓한 텃밭 가득 풀무치 소리

뒷산 응달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평평해진 무덤에

죽은 짝을 찾는 귀신들이 밤마다

가스 새는 소리 쉼 없이

구시렁구시렁

 

귓전을 때리다가 결국은 자드락길로 사라졌다

 

*자드락길: 낮은 산기슭에 비탈진 조붓한 길

*볕뉘: 작은 틈새로 비치는 햇빛의 기운. 은인이 베푸는 보살핌.

 

웹진 『시인광장』 2022년 9월호 발표​

 

 


 

김도봉 시인

경북 김천에서 출생. 포르투갈 어문학 전공(브라질어). 2021년 《월간문학》시 부문 <신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산문집 『그대는 가을로 온다』와 시집『길의 배반』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