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봉 시인 / 자드락길 볕뉘
자드락길 볕뉘는 아직도 안녕하다
잊은 듯 가끔 색 바랜 일기장을 찾아 펼치면 몽당연필에 침 발라 쓴 입 삐뚤어진 글씨들이 빼곡히 압화처럼 눌려 있다
태풍 사라호가 그 먼 데로 떠밀고 간 황토 교실 넘실대던 흙탕물 속에서 망연히 하늘만 쳐다보다가 집 없는 집을 찾아 발걸음 옮겨야 했던 자드락길
볕뉘 쪼잔 했던 그 길 그 담장을 따라 노오란 탱자가 오종종 감싸 안은 마을 앞마당 한 켠에는 앉은뱅이 채송화가 그림자 한 뼘 차지하고 있었다
조붓한 텃밭 가득 풀무치 소리 뒷산 응달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평평해진 무덤에 죽은 짝을 찾는 귀신들이 밤마다 가스 새는 소리 쉼 없이 구시렁구시렁
귓전을 때리다가 결국은 자드락길로 사라졌다
*자드락길: 낮은 산기슭에 비탈진 조붓한 길 *볕뉘: 작은 틈새로 비치는 햇빛의 기운. 은인이 베푸는 보살핌.
웹진 『시인광장』 2022년 9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성희 시인 / 상처를 따라 걷다 외 1편 (0) | 2022.12.21 |
---|---|
조연호 시인 / 행복한 난청 외 1편 (0) | 2022.12.21 |
정윤서 시인 / 나 여강(麗江)의 키 큰 미루나무라면 (0) | 2022.12.21 |
임승유 시인 / 과거 외 1편 (0) | 2022.12.20 |
김신혜 시인 / 대관람차 외 1편 (0) | 2022.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