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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선형 시인 / 짐짓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21.

이선형 시인 / 짐짓

 

 

 횡단보도 앞 난전에서 콩을 파는, 불린 메주콩 같은 아주머니, 오늘도 비 둘기를 쫓느라 매를 든다. 염치 없다며 고개를 빼들고 둘레둘레 딴전을 피면서도 먹을 것이 소복하게 담겨 있는 앞을 비둘기는 좀체 뜨지 못한 다. 배고프기야 네 사정이 내 사정이라고 땅, 땅, 땅. 나무 작대기는 차마, | 비둘기 옆 땅바닥만 친다. 엄마야! 비둘기는 날개를 가누지 못하는 시늉 만 장단 맞추고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가는 고개만 돌리고 또 다가 선다.

 

 어릴 적에 어머니, 회초리로 방바닥만 때리며 짐짓 몰아치던 그 때.

 

 기어코 콩을 삼키는 비둘기 놀랜 목구멍 옆에서 졸다가 깬 아주머니, 혼자 먹는 길 위의 점심도 구르듯 목구멍을 타넘는다

 

 


 

 

이선형 시인 / 나무 그림자에 쉬다

 

 

자기 앞에 그림자 하나 툭 떨어지고

지난 일이나 앞일이나

생각도 없는, 터벅터벅 걷는 밤 있습니다.

녹초가 된 날이지요

마음의 무엇이 혼자 후렛쉬를 켜고

발 앞만 밝히고 가는 집중이 있습니다.

가다가 외진 길가에 겨울나무

제 그림자를 보고 서 있습니다

실가지 그림자 위에 내 그림자 겹쳐집니다

나뭇가지에 잠깐 날개를 쉬는

새 그림 같습니다

기분이 좀 좋아집니다

그러고 빈 길을 걸어가니 거기

새가 날아가는 하늘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오르려 하다가 스스로 장난이 싱겁습니다

 

잠깐의 시렁뱅이 꿈만큼이나 한 게 있던가, 뭐

자기의 생을 아끼며 살아가려고, 깐에

나도 한 생물체로서

의기소침하여 줄어지는 그림자에게

나는 말을 붙였습니다

물론이지요 옆구리 사이로 부추기는 것이지요

고마운 날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야 알지요

그렇지만 나무 그림자에 깃들고 싶은 날들도 있는 거겠죠

정말 숨쉬는 새, 그런

 

 


 

이선형 시인

1958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하였으며 동아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 1994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슬픔』 외에 6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현재 '월요시'와 '시작업이후' 동인이다. 시집으로 『밤과 고양이와 벚나무』(시와사상,2000)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