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시인 / 무게만큼 생각이 있다면
몸무게보다 생각이 무거워지는 날이 있다. 별일도 없는 하루를 시작하는데 갑자기 걸려 온 낯선 전화 한 통. 마이너스통장의 잔고보다 가벼운 일상과 무관한 상담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 붉어지게 만드는 몇 십년 전의 일처럼, 불현듯 쏟아져 온 사소했던 그 일이 오늘 벌어진 사태처럼 낯설고 부끄럽다. 그런 날이 쌓여 전쟁이 터졌을 거라고, 뉴스는 매일 분노를 감지하지 못할 만큼 주검의 숫자를 반복해서 알려주고 있다. 쌓지 못하는 일상인데 내가 깃들고 있는 허름한 부대자루에는 매일 번잡한 전쟁 직전의 예민한 상황이 끝없이 반복되고 사라진다. 속은 부글거릴텐데도 흔들리지 않는 가스통. 침잠한 슬픔이 주방에서 신기루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은 시간조차 종잡을 수 없다. 불꽃을 볼 때마다 ‘불을 일으켜 세우는 데 필요한 것은 가장자리에서 맴도는 기억 하나면 충분한 것일까’라고 묻고 싶어진다. 멀건 얼굴로 왈칵 쏟아지며 흐르는 이유는 바람이 금방 지나갔기 때문이었을까? 소금밭에서 햇볕은 여전히 타오르는데, 무료한 하루를 삼키는 것은 어느 바다의 낭떠러지에서였는지. 새로운 정보의 지시때문이었는지, 바다를 주관하는 것은 파도의 방향때문인지...
스팸메일함에 정보가 어떻게 담겨있는지 함을 열어 보는 것은 정말 햄이 생각나서였을까?
무게를 잃어버린 천공을 나는 새의 날개는 몇겁을 거쳐야 가벼워진 것일까. 두렵다. 희미해지는 것은 슬프고, 두려운 것은 외로운 것에 엮이고 또 그리워지는 것이 되고 말고, 가벼워지는 것은 낙화의 또 다른 변신처럼 익숙하지 않은 일상이어서 더욱 두렵다. 다시 생각의 입구를 찾아가야 한다. 뒷문도 없고 의지와 상관없는 내 생각의 무게를 되찾기 위해서 다만 *시계 위를 내가 떠돈다. 입구를 찾지 못해서 몸을 일으켜야 한다.
* 최정례 시인의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중 ‘있음과 있음의 사이에서’ 차용함.
웹진 『시인광장』 2022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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