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하 시인 / 스톡홀름 증후군
태어나는 순간 인질이죠 인질범에게 인질은 돌파구이자 협상 테이블 이 관계가 오래되다 보면 반려가 되고 혈육이 되어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천적을 상대하려면 천적과 겨뤄 봐야 아는데 천적은 먹고 먹히는 관계라서 무의식중에 내뱉는 죽을 것 같아는 말 그 말에는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들어 있는 식물의 성욕은 동물보다 강해서 벗어날 생각은 벗어날 수 있을 때 하는 것
한라푸른부전나비 천적인 맵시벌을 피해 다니다가 얼떨결에 가시엉겅퀴꽃에 앉고 말았죠 최면 상태에 들게 하는 자주색 붉은 꽃잎 하나하나가 바늘방석인 줄도 모르고 달콤한 꽃술에 걸려든 나비 진짜 사랑 한 방을 맞은 거죠 그날부터 엉겅퀴를 사랑하게 되었죠
-시집 『다음 달부터 웃을 수 있어요』, 파란, 2019
이담하 시인 / 사과가 가득한 방
입속을 들여다보는 의사는 좁쌀만 한 결절에 즐거워요 성대결절입니다
어쩐지 나는 로맨틱한 마음이 들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의사가 입을 열어 다섯 번째 계절과 숨은 계절을 보여준다
결절된 성대 부근을 보면 상처가 보여주는 용례는 자주 갈라진다고 해요 입속에 두 개의 사과가 있다고 의사는 정정해요 빈방에 통증이 숨어 있다고 또 정정해요
두 계절의 성분은 무엇입니까
의사는 자기 가슴을 또 한 번 열어 돌아오는 계절과 돌아오지 않는 계절을 보여 준다 당신이 만든 계절과 신이 당신을 만든 계절 중에 어느 계절을 믿는지 묻는다
저는 제 몸의 온도와 속도만 믿어요 통증은 하나의 계시라서 누구나 믿을 수 있고 자란다는 특징이 있어요
입속을 들여다보는 의사는 빈방을 보고 즐거워해요 방에 피 묻은 붕대가 가득하다고 말해요 사과가 가득하다고 정정을 해요
나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아요
방은 이제 무엇으로 가득한가요
-시집 『다음 달부터 웃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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