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 시인 / 교실
오늘도 나는 아이들에게 빨리 걸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천천히 걸으면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씨름 잘하는 아이에게 왜 달리기는 하지 못하느냐고 화를 낸다. 오늘도 나는 푸른 세쿼이아 나무 한 그루에게 큰 숲에 가야만 큰 나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잡목림에서는 들꽃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늘도 난 아이들에게 거대한 행복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한다. 작은 아이들의 작은 행복은 모른 체한다. 오늘도 난 높이 오르면 멀리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렇지만 높이 오르려면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시집 『내가 침묵이었을 때』(문학의전당, 2016) 수록
류경 시인 / 언어의 여행
나는 처음에 아담의 입에서 태어나 우리가 태어난 것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흙에 다음에는 영원을 꿈꾸며 석판에 새겨졌죠 나는 선과 악을 기록하기도 하고 창세 신화도 기록하고 때론 백과사전에 명예란 이름으로 앉아 있기도 하고 세상의 책 속에서 고요와 함께 잠을 자기도 한답니다. 침묵과 소음의 중간지대가 나의 영토.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들에 운명이란 이름으로 나를 붙이기도 하고 우리 곁에 와 있는 신에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를 붙이기도 하고 고통을 신의 얼굴이라 부르기도 하죠 나의 아주 오랫동안의 동행은 파피루스였고 A.D. 2000년1월3일인 오늘은 빛의 속도로 쓰이고 있죠 사람들은 이것을 희망이라고도 부르고 절망이라고도 부르지만 내게는 그냥 낭만적인 여행일 뿐이죠.
시집 『내가 침묵이었을 때』(문학의전당, 2016) 수록
류경 시인 / 결혼
그가 뚜벅 뚜벅 정원을 걷는다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창문을 함부로 두드려 보기도 하고 꽃을 꺾기도 하고 그녀가 문 뒤에 서서 숨죽이고 지켜보는 동안 문을 열고 들어 와서는 새로 생긴 물건들을 만져보고 일기장을 들쳐보면서 자기만의 문법으로 중얼거린다 슬퍼진 그녀는 그 슬픔에 화사한 옷을 입혀 보기도 하고 색칠을 해 보기도 하고 안 보이는 곳에 두기도 하고 아주 멀리 여행을 가서 그곳에 버리고 오기도 하는데 슬픔은 항상 그녀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있다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하면 어두운 기억들이 와서 아니라고 하고 그를 미워한다고 말하려고 하면 행복한 추억들이 와서 손을 내 젓는다 빨간 지붕에 살고 싶은 남자와 녹색지붕에 살고 싶은 여자가 흐린 얼굴의 아이들을 낳는다 낯설고 친해지지 않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밤에 낯선 여인이 나를 낳았고 낯선 사람의 장례식에 검은 옷을 입고 간적이 있다고 일기장에 쓴다
류경 시인 / 안식휴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노트 같은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간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하늘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본다. 무지개도 하나 그려본다.색들을 하나하나 칠해본다. 나뭇잎 한 장 바람 한 올 햇빛 한 점을 넣어서 열매를 하나 빚는다. 자,이제 백아기의 석탄층쯤에 들어가 영원히 잠을 자는 거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는 노트에서는 수평선이 유목민의 지평선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류경 시인 / 혼혈
내피에서는 동양의 상형문자와 아프리카 초원의 풀 냄새가 나 난 완전히 웃을수도 잠들수도 죽을 수도 없지 내가 웃을 때 내 피의 일부는 울고 내가 잠들 때 내 고향 마을에서는 태양이 떠 오르기 때문이지 내가 죽을 때 다시 시작되는 나뭇잎의 꿈
사랑이 질문을 하는동안 나는 오래전에 마침표를 찍은 어떤 문장을 생각하고 사랑을 위해서는 다섯 개의 음계만 사용하기로 해 불행한 아이가 세상을 그릴때 다섯 개의 색깔만 쓰는 것처럼
과거롤 가는 길에서는 지워진 여자아이 하나가 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미래로 가는 길에서는 어른이 된 내가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 각진 시선에 난 항상 가슴을 베인다 꺾꽂이 된 상처에서는 항상 피가흐르고 지워진 기억이 아프다
드골공항 스타 얼라이언스 데스크에 피의 성분을 알 수 없는 여자 하나가 앉아 있다 두 대륙이 만든 여자가
류경 시인 / 묵언 수행
내 영혼은 말을 잃어버린지 오래 세상에 결별을 선언한지도 오래 목소리 없는 사람들만이 내친구 나무의 몸에 편안히 잠들어 있는 그를 깨워 공원의 벤치로 간다
오선지에 그릴수 없는 음악 볼수 없는 색 들리지 않는 소리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그곳에 있다 -2004년 《시와 세계》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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