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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말씀묵상]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3.

[말씀묵상]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 도전하고 도약하는 믿음, ‘새로고침’

제1독서 말라 3,19-20 / 제2독서 2테살 3,7-12

복음 루카 21,5-19

가톨릭신문 2022-11-13 [제3318호, 19면]

 

 

죄악 가득찬 성전의 진실 보신 주님

허울 좋은 겉모습에 치중하지 말고

새로운 마음 다잡아 하느님 섬기길

 

 

 

데이비드 로버츠 ‘티투스의 지휘하에 있는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와 파괴’ (1850년)

 

 

우둔하여, 작업시간이 긴 편입니다. 두어 줄로 끝나는 짧은 문장도 수없이 수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이 글도 지우고 또 지우는 ‘새로고침’으로 시간을 흘리는 중입니다. 문득 주님께서도 우리네 삶을 ‘새로고침’해 주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믿음을 심어주시고 희망을 돋워주시며 사랑을 실천하도록 우리 마음을 새로이 또 새로이 고쳐주고 계신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면밀하게 살펴 고쳐주시는 주님 덕분에 우리의 오늘이 어제보다 한 걸음 더 천국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어졌습니다. 때문에 바오로 사도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라고 말한 것이라 생각하니, 든든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꿈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믿음으로 도약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을 톡톡 건드려 ‘새로고침’ 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내어 맡기는 평화의 나날을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그날 예루살렘 성전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말하던 이들의 음성에 자랑스러움이 묻어있습니다. 아마도 웅장한 성전을 건축해서 민심을 다독이려던 헤로데의 속셈을 용인할 만큼, 성전의 위용이 엄청났던 것이라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확,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우쭐한 제자들의 말을 딱 잘라 무안을 주십니다. 내심 그 성전이 십시일반의 ‘자원 예물’이 모여 세워졌다는 자부심에 젖었던 제자들이 참 뜨악하고 민망했을 것도 같습니다.

 

물론 주님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 없기에 다각적인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구절을 전통을 헐어내고 새로운 복음을 세울 것이라는 예언으로 풀어도 무방하고 요한 사도의 설명처럼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요한 2,21)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도 무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말씀의 요점은 당신의 성전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결코 화려하고 웅장한 겉모습만으로 평가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성전의 외관에 전혀 관심이 없으신 주님의 시선은 오직 거룩한 척 위장하고 대단한 척 포장하며 거드름을 피우며 성전을 들락대는 이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짜 신앙인들 탓에 성전에 죄악이 그득한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죄, 감추어진 죄들로 이제 곧 멸망할 수밖에 없는 성전의 진실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전에 들어서면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로 성호경을 긋습니다. 그렇게 마음과 몸에 주님의 십자가를 새깁니다. 제대를 향하여 깊이 머리 숙여 경배드리며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때론 간절한 염원을 아뢰고 아픔을 토로하며 고통을 봉헌하며 주님을 만납니다. 말씀에 ‘아멘’이라 화답하며 언제나 무엇에나 신앙적 자세를 견지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마음만큼은 충분히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생각만큼은 철저히 당신을 따를 것이라는 동의에 이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뿐입니다. 돌아서면 그만입니다. 그저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신앙의 딜레마라며 주저앉습니다. 새 삶으로의 도전을 포기하며 지냅니다. 걸핏하면 자신의 성공을 알아주기를 기대하고 자신의 남다름을 뽐내려 듭니다. 자신의 성과가 얼마나 값지고 귀하고 대단한지 자랑하고 으스대기도 합니다. 마침내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나중나중’으로 밀어버립니다. 그 ‘나중’이 과연 언제일까요? 과연 그 나중을 깨어서 맞이할 수는 있을까요?

 

지금 현재 주님의 칼 같은 말씀이 우리 영혼을 꿰찌른 이유입니다. 세상의 현란한 경제론에 몰입하여 세상 논리에 맞춰 헤매는 우리 삶이 편치 않은 이유입니다.

세상을 향한 주님의 시선은 이천 년 동안 변함이 없으십니다. 아니 세세 무궁토록 한결같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것에 몰입하는 어리석음을 향한 일갈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존경받는 자랑스러운 삶이나 뽐낼만한 궤적도 일절, 심판 날에는 플러스가 되지 않을 것이란 진리를 엄중히 선포하십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은 허울 좋은 겉모습으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경고하십니다. 믿음인은 겉이 아니라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임을 선포하십니다.

 

하늘의 삶을 꿈꾸는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주님께서 마음과 삶을 새롭게 복구시켜 고쳐주시며 새로운 복음을 살게 해주시리라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이 썩 내키지 않아서 마음이 구겨질 때, 기껏 희생하고 봉사한 후에 자꾸 손해를 본 것만 같아서 마음 구석이 알싸해질 때, 망설이지 말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손대어 고쳐주시길 청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그분의 손길에 기댈 때마다, 완벽하게 ‘새로고침’ 시켜주실 것이란 약속에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하늘의 법을 온전히 살아내려 노력하며 도전하고 도약할 때, 주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몹시 기뻐하며 우리를 고쳐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부산가톨릭대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교무처장 및 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