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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감태준 시인 / 비단 한 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21.

감태준 시인 / 비단 한 필

 

 

 당신한테 오간 길 감으면

 비단 한 필은 족히 나올 터.

 

 이젠 슬며시

 손을 놓으셔도…

 

 내 머리 위 오리나무 하늘에

 마구 길을 내는 새를 따라가셔도…

 

 가시는 숲 어디인지

 주소 주지 않으셔도…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저녁놀 바라보는 하늘은 하나

 

 이 비단 한 필이면 어느 마을 살아도 마음거지는 면할 터.

 

 비단 올올이 풀리는 추억만 감아도

 이생에서는 다 감지 못할 터.

 

- 『기독시문학』 21년도 하반기호에서

 

 


 

 

감태준 시인 / 식탁 둘레

 

 

식탁 둘레에 모여 있는 의자들을 쳐다본다

다들 조용하다

두 딸은 시집 가고 아내는

늦는 아들을 기다리다 방에 들고

 

나는 슬그머니 아내의 의자에 가서 앉아본다

아들 옆의 끝엣자리

이 위치에서 아내는

밥 먹는 식구들을 둘러보았으리

아침상에 보이지 않는 두 딸의 의자를 느끼고

아픈 젖을 한번 더 떼기도 하였으리

 

그런 날이 또 올 것이다

그때에도 아내는 또 한 젖을 떼며

의자 구석구석을 닦고 문질러 윤을 내고 있으리

 

불을 끄면 식탁 둘레가 더 적막할 것 같다

불을 끈다

아내의 얼굴이 꺼지지 않는다

 

-시집 『역에서 역으로』에서

 

 


 

감태준 시인

1947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한양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1972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 『역에서 역으로』 『몸 바뀐 사람들』 『마음이 불어가는 쪽』 『마음의 집 한 채』 『사람의 집』 『70년대 젊은 시인들』(공저) 등. 월간 《현대문학》 편집장 및 주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예술대학장 역임. 한국시인협회상, 녹원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잡지언론상 등 수상. 현재 문화예술인모임 <강변클럽>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