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정 시인 / 샛길을 가진 여름
긴장하며 움츠리는 촉수와 촉수 잰걸음의 빗줄기가 건너가는 바위섬 너머
무덤은 자라나고 시골길 차양 막을 따라 신산하게 잎새가 펼쳐지고
빗줄기의 파장으로 뻗어 보는 잎새의 촉수와 촉수 빗소리와 빗소리의 연속선으로
촉수가 갈라진다 세 갈래 네 갈래 갈라지는 샛길을 가진 여름은 가지를 들추면 빗소리 철벅이는 진창을 가진 잎사귀 이름
투명하게 자라나는 코랄빛 돌기로 세밀화가 되어 가는 샛길 무성하게 비롯되는 촉수로 여름은 먹구름의 불면을 가진 이름
추락하길 즐기는 연장선을 가진 샛길로 쪼개지는 밤을 가진 나를 부르며 소금밭 서성이는
빛나지도 어둡지도 않은 날들 잔뿌리를 빗물에 담근 마음
표백제에 담궈도 풀물 든 시절은 잎사귀가 끄덕이는 샛길에서 더욱 선명해져
진창이란 이름으로 무성해진 잎사귀들, 쓸쓸해진 빗물이 남기고 간 언덕배기 펼쳐진 초록 모자와 함께 구르기 좋은 이름
샛길에서 생긴 약속은 작은 날개를 감추고 있지 선명하게 풀물 든 약속이 붕대를 감고 잠시 절룩이며 지나가
잊어버린 일조차 모른 채 지나가 진창이란 망각으로 비릿한 숨을 가진 여름
초저녁 길 끝에서 마주친 작약은 노란 꽃술 남김없이 보여 주고 멀어지지 빗소리 철벅이는 잔뿌리 가진 마음 샛길에 세워 두고
시집 『수박사탕 근처』(2022) 수록
최윤정 시인 / 구석들 1
벽돌이 되지 구석이 모여 지붕이 되고
담벼락이 되지 물길 건너가다 죽은 새들이 되기도
물들어가곤 하지 회색에서 붉은색으로
*
구석은 구름처럼 생각이 많고
죽은 새의 뼈를 불면 무슨 소리가 날까
불 붙지 못한 구석들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곰팡이꽃이 눈처럼 쏟아진다
*
죽은 새의 환영이 창틀마다 끼여있다
놓칠 것도 던질 것도 없는 계절 물방울들 무겁게 떠 있고 걸음 멈춘 창틀이 간간이 늑골을 삐걱인다
꿈틀거리며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구석마다 몰려있던 구름들 등 곧추세우고
햇살에 흩어지는 먼지 사이 바람의 혈관이 붉게 부풀어오른다 안부를 묻고 멀어지는 구름의 발자국처럼
*
여긴 여전히 빙벽 춥고 미끄럽다 다리가 퉁퉁 부은 바람은 무릎에 손을 짚고 참았던 숨 몰아쉰다
각각의 빙벽은 춥지만 둥글게 모이면 따뜻하지
손가락을 오므린다 무얼 담지?
최윤정 시인 / 구석들 4 ― 끼여 있다
테니스공 하나가 장미넝쿨 울타리에 끼여 있다 노랗게 굴러오던 웃음은 잿빛으로 말라붙어
사무실 책상 틈바구니에 비정규직 박금자씨 이력서가 끼여 있다
열쇠가 뽑히지 않는다 회계장부 수납장 자물쇠에 꽂힌
뽑히지 않는 열쇠끼리 입술을 부딪는다
오후 세시가 윙윙거리며 헛구역질을
최윤정 시인 / 구석들 5 ― 승부
당신과 내가 마주앉은 평상을 수놓는 검은 침묵들 모서리끼리 맞물려 있다
갈증은 둥글게 타오르는 벽이 되고 상실감은 까만 재가 되어 벽 안에 갇혀 있다
누가 벼랑이고 누가 구름일지 서로의 축축해진 이마를 훔쳐본다 햇살과 마주앉은 상처투성이 주렴은 빛나서 수없이 부서지기도 했다는데
숨결은 서로의 시선 한코씩 밟으며 감정의 쐐기 잡아당기며 팽팽해져 가는구나 지감(指感)은 갈 길을 잃고 난독증에 걸린듯 떨고 있구나
비상구 없는 내용과 형식 속에서 평상의 감정이 머리칼 풀어헤친다 평상은 잠시 끈적거리는 당신과 나의 사적인 세계
기도를 한다 포석은 가장 낮고 진한 빛으로 검은 돌에게
시작은 감감했지만 끝은 분명할 자리 꽃잎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날아오르고 날아오르는 눈빛 사이 벌떼들이 떠 있다
외곽은 멀고 돌아갈 집은 없구나 구부러지는 오후의 등뼈 너머 납작해진 종이상자가 된 느낌
판을 깨기엔 늦은 바람이 분다 잠금장치가 풀린 총구 앞에서 부서질수록 단단해지는 물방울이 되는 느낌 햇빛과 바람을 삼킨 주렴의 숨결이 삼베 보자기마냥 평상을 덮어간다
최윤정 시인 / 구석들 7 ― 발효
달이 제 그림자 깔고 앉아 물 위에서 산란한다
밤이 닫힌 눈을 열고 연못을 쓰는 사이
달의 알을 물고 빛부스러기가 수련의 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잠수를 한다 잠 못드는 수련을 데리고 얼굴이 잠수를 한다
얼굴은 발효되지 않았고 물속은 차다 이가 딱딱 부딪힌다
밤이 잠든 사이 못물이 밤의 입술 밖으로 천천히 미끄러진다
밤의 입술 사이 빛이 고물거리며 묻어 있다
최윤정 시인 / 초록 우산에 관한 감정
물컵 바닥에 묻은 얼룩을 지운다
시침과 분침이 공중에서 갈라지듯 수염이 짝짝이로 길어지는 기분 꼬리지느러미가 얇게 길어지는 기분
구부러진 손잡이를 잡는다 손가락에 힘을 줄수록 몰아치는 비릿한 냄새 눅눅한 침묵을 사이에 두고 철봉을 미끄러지는 손가락의 기분
점점 바깥이 된다 그를 써도 비를 다 가릴 수 없고 그를 펴도 맘을 다 말릴 순 없겠지 점점 물체가 물컹해지는 시간
골목길 담벼락을 기어오른다 자세를 바꿔볼까 입술이 투명해진 담쟁이 넝쿨 흠뻑 젖은 북극성이 손을 잡고 빙그르르 돌리면 다시 자란 물방울이 춤추곤 해
푸른 계단 입구 패인 자국의 손잡이를 잡는다 곤줄박이 울음소릴 내던 살이 만져져 ... 셋 넷 다섯 ......
발끝이 곤두서게 되는 걸 빗방울이 낯선 창틀에 잠기는 순간만큼 차가운 물컵에 발을 담근 양파의 기분
자세를 바꿔볼까 빗물 잠재우며 솟구치는 풀잎의 기분
계간 《작가세계》2014년 겨울호 신인상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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