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희 시인 / 전철을 탄다
전철을 타면 기다림의 시간은 아득히 멀어진다 숨 가삐 돌아가던 나의 일상도 잠시 흐름을 멈추고 열차의 흔들림 속으로 흔들거린다
사람들은 혼자만의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거나 전철과 같이 흔들리면서 누군가에게 열심히 문자를 보내거나 잠시 터널을 지나는 동안에도 카톡에 빠져 있다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같은 방향을 가면서도 서로에게 눈감고 다른 길로 향한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으로 모두 타인으로 오고 가는 사람들
전철을 타면 시간의 흔들림 속으로 아득한 기억 속으로 흘러가는 세월은 아득히 멀어진다
-정완희 시집 『붉은 수숫대』
정완희 시인 / 만추
길을 걷는다 붉은 손바닥 흔들던 단풍잎들은 둥그런 조막손이 되어 가랑잎들과 함께 내 발밑에서 아프게 부서진다
용서하라 용서해다오 내 한목숨 부질없이 살아온 세월 속에서 내 말 한마디로 상처받은 사람들과 내 발자국으로 인해 부서진 낙엽들이나 죽어간 벌레들과 개미들 나도 모르게 나에게 짓밟혀진 상처받은 영혼들이여!
가을비가 내린다 마지막 남은 단풍잎들이 내 뺨을 후려친다 내 차의 유리창에 수십 개의 빨간 손바닥들이 붙어 있다
-시집 <장항선 열차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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