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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용숙 시인 / 가족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

조용숙 시인 / 가족

 

 

오르막 산길에 까치발 딛고 서서

 

햇빛을 수혈받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쩍쩍 갈라진 몸피와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잎사귀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팍

무엇이 그토록 생에 대한 집착의 끈

놓지 못하게 했을까

새까맣게 썩은 그의 가슴팍에 주소를 옮기고

이삿짐을 부린 버섯과 벌레의 일가

제 안에 들어와 이젠 식솔이 되어버린 그들을

나무는 차마 내칠 수 없었던 것일까

다 함께 죽을 수도 없는 삶

이제 더 이상 혼자일 수 없는 그는

하늘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쟁여두었던 뿌리의 체온을 끌어올려

식솔들을 감싸 안는다

이른 봄 성치도 않은 나무의 몸에 피가 돌 듯

연푸른 잎사귀 돋는 것은

몸에 새긴 봄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긴 시간의 물살을 온몸으로 견뎌온 자만이

저 아닌 다른 것을

제 생의 빈터에 받아들인다

 

 


 

 

조용숙 시인 / 살곶이다리*

 

 

 기럭지로 보나 딴딴한 생김새로 보나 쭉 뻗은 기상이 훤칠한 근육질 사내였는데요 여자라면 한번쯤 침이 꼴깍 넘어가는 장신이었는데요 바야흐로 밤꽃 냄새 진동하는 시절이라 어떻게 그 사내 눈에 한번 들어볼까 싶어 생전 안 바르던 빨강 립스틱도 바르고 눈 꼬리도 살짝 치켜 올렸는데요 워낙 다릿심이 좋아 따라 붙는 여자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얼굴 값 하느라 그런지 웬만큼 살랑거려서는 꿈쩍도 안 하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순진한 처녀들 그 다리 한번 넘어갔다가는 다시는 처녀 행세하기 힘들다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울을 다 품을 만큼 넓은 가슴이면 뭐해요 자나 깨나 눈에 담은 그리운 사람 보란듯이 가슴 한가운데 띄워놓고 밤낮없이 한강수 타령이나 불러대는 사내 여자 마음 다 매 한가지라고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그렇지 가슴은 엄한데다 팔아먹고 아랫도리만 훌렁훌렁 내린다고 한 평생 정 붙이고 살 여자가 어디있겠어요 다릿심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미우나 고우나 한평생 마음 맞춰 오순도순 사는 건데요

 

*청계천과 중랑천 사이를 잇는 다리로 한강의 지류와 본류가 만나는 지점의 형상이 뾰족하게 생겼다고 하여 살곶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북한말로는 성교를 의미한다.

 

 


 

조용숙 시인

1971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 석사. 공주대 국문학과 박사 과정. 2006년 『詩로 여는 세상』을 통해 등단. 2013년 대전문화재단 문예기금 수혜. 시집『모서리를 접다』. 『어디서 어디까지를 나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