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숙 시인 / 가족
오르막 산길에 까치발 딛고 서서
햇빛을 수혈받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쩍쩍 갈라진 몸피와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잎사귀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팍 무엇이 그토록 생에 대한 집착의 끈 놓지 못하게 했을까 새까맣게 썩은 그의 가슴팍에 주소를 옮기고 이삿짐을 부린 버섯과 벌레의 일가 제 안에 들어와 이젠 식솔이 되어버린 그들을 나무는 차마 내칠 수 없었던 것일까 다 함께 죽을 수도 없는 삶 이제 더 이상 혼자일 수 없는 그는 하늘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쟁여두었던 뿌리의 체온을 끌어올려 식솔들을 감싸 안는다 이른 봄 성치도 않은 나무의 몸에 피가 돌 듯 연푸른 잎사귀 돋는 것은 몸에 새긴 봄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긴 시간의 물살을 온몸으로 견뎌온 자만이 저 아닌 다른 것을 제 생의 빈터에 받아들인다
조용숙 시인 / 살곶이다리*
기럭지로 보나 딴딴한 생김새로 보나 쭉 뻗은 기상이 훤칠한 근육질 사내였는데요 여자라면 한번쯤 침이 꼴깍 넘어가는 장신이었는데요 바야흐로 밤꽃 냄새 진동하는 시절이라 어떻게 그 사내 눈에 한번 들어볼까 싶어 생전 안 바르던 빨강 립스틱도 바르고 눈 꼬리도 살짝 치켜 올렸는데요 워낙 다릿심이 좋아 따라 붙는 여자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얼굴 값 하느라 그런지 웬만큼 살랑거려서는 꿈쩍도 안 하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순진한 처녀들 그 다리 한번 넘어갔다가는 다시는 처녀 행세하기 힘들다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울을 다 품을 만큼 넓은 가슴이면 뭐해요 자나 깨나 눈에 담은 그리운 사람 보란듯이 가슴 한가운데 띄워놓고 밤낮없이 한강수 타령이나 불러대는 사내 여자 마음 다 매 한가지라고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그렇지 가슴은 엄한데다 팔아먹고 아랫도리만 훌렁훌렁 내린다고 한 평생 정 붙이고 살 여자가 어디있겠어요 다릿심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미우나 고우나 한평생 마음 맞춰 오순도순 사는 건데요
*청계천과 중랑천 사이를 잇는 다리로 한강의 지류와 본류가 만나는 지점의 형상이 뾰족하게 생겼다고 하여 살곶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북한말로는 성교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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