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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개미 시인 / 재의 자장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3.

김개미 시인 / 재의 자장가

 

 

창문을 열어도 바람은 없단다 일주일이면 어떻고 한 달이면 어떻니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단다

눈을 감으렴 꿈속에서 찧고 까불고 날아다니렴

그림자만 밟아도 아프지 않니 먹어보지도 않은 약이 없지 않니

고통이 너를 삼켜 참을 수 없는 날이 오면 내 깃털을 뽑으렴

비통에 젖은 노래만이 심장의 피를 돌린단다

햇살 한줄기면 된단다 그것만 쥐고 있어도 눈이 떠진단다

돌을 씹던 날들을 잊어라 배란과 배설이 너를 놓아줄 때까지

사랑이란 젖니처럼 쓸모없단다 낮과 밤이 없는 여기선 죽는 날까지 열이 내리지 않는단다

칼날 같은 눈빛을 쉴 수 없단다

그러니 아가야, 기타 소리를 들으렴 아직 따뜻한 내 심장을 쪼아먹으렴

 

 


 

 

<동시>

김개미 시인 / 화분 속 장미

 

 

우리 집엔

근사한 대문도 없고

넓은 서재도 없고

아늑한 다락방도 없습니다

 

그런데 장미가 피니까

티나를 초대하고 싶어집니다

티나에게 장미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티나가 장미를 달라고 하면

가위로 잘라서 주겠습니다

 

지난주에 장미 봉오리가 맺혔을 때

나는 장미가 누구 것인지 알았습니다

 

나에게 생기는 모든 아름다운 것

그중에 처음 것은 다 티나 것입니다

 

-월간 시인동네 2019.8월

 

 


 

김개미 시인

1971년 강원도 인제 출생. 2005년 《시와 반시》에 시를, 2010년 《창비 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앵무새 재우기』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동시집 『어이없는 놈』 『커다란 빵 생각』 『쉬는 시간에 똥 싸기 싫어』, 그림책 『사자책』 『나의 숲』 『나랑 똑같은 아이』, 시그림집 『나와 친구들과 우리들의 비밀 이야기』를 냄. 제1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수상. 제1회 권태응 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