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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정 시인 / 국사발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7.

문정 시인 / 국사발

 

 

설거지를 하다 발견한 금이 간 국사발

그러고 보니 참 오래도록 내곁에 있었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가느다란 실금

언뜻 보면 멀쩡한 그릇으로 보인다

생을 놔 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마음에 실금을 안고 살아온 나를 보는 것 같다

 

나를 붙들어 잡아 준 모세혈관들

그래도 그릇이라고

 

아직도 심장에서 나오는

뜨거운 피가 매일 아침 담긴다

담기면 비우고 담기면 또 비우며

시지프스처럼 살아온 생이다

 

오십 중반을 넘기니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다리가 저리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린다

작은 바람에도 마음에선 폭풍이 인다

실금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보다 우여곡절을 더 담았던 '나' 라는 그릇

다행히 아직 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

 

 


 

문정 시인(1961-2013)

1961년 전북 진안에서 출생. 본명: 文錠熙. 전북대학 국문학과 졸업.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하모니카 부는 오빠〉가 당선되어 등단. 2012년 제1회 '작가의 눈 작품상' 수상. 유고시집 <하모니카 부는 오빠>. 전주 우석고 국어교사. 2013.09.11 심장마비로 별세.(향년 5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