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경 시인 / 일요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목욕탕 앞이었다 이발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영 슈퍼 간판 아래 한 여인이 비눗갑을 손에 든 채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이발소 거울 앞에 앉아 그녀의 젖은 머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면도칼이 나의 뒷덜미를 슥슥슥슥 긁을 때 하얀 와이셔츠 자락이 내 뒤에서 유령처럼 춤추고 있었다
전국 노래자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후 마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허공으로 상어 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서대경 시인 / 차단기 기둥 옆에서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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