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빈 시인 / 그늘 속의 그림자들 내가 처음 알아본 것들: 빗소리, 허리띠 풀린 커튼, 가라앉지 않는 빗금 많은 호흡 나를 처음 알아본 것들: 재채기, 너무 밝은 곳에 드러난 뿌리, 빈 화분의 그늘 속의 그림자들 가지 끝으로 내몰리는 물방울, 노랑을 에워싼 초록의 일렁임 한가운데, 박동하는 검붉은 얼룩, 눈에서 맥박이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는 쪽으로, 내가 여러 번 살아낸 것들: 이름들, 이르지 못한 비와 빗방울들 사이 몇 개의 비유, 앙상한 침묵, 혀끝으로 더듬어지는 내게서 여러 번 죽어간 것들: 빗방울 그늘에 떨어진 얼굴, 감긴 눈 속에 눈뜨는 돌들의 낮고 느린 비명
그의 분주한 코, 무례한 손, 다급한 입 더 파고들 수 없다. 가려운빛, 눈에 옮아 붙는 이끼, 잿빛 털뭉치의 검붉은 기침, 더 깊어질 수없다. 그가 나를 덮친다. 먹고 잠들라 깨어서 마저 먹어라 다 먹으면 안쪽부터 다시 먹혀라. 나로 살아갈 것들: 젖은 돌 젖은 그늘 젖은 빗방울
나로 죽어갈 것들 내리막, 바퀴살의 목마른 빛 거품, 거품들, 마른 거울의 얼룩들 얼굴 위로 밀려드는 흰 자갈밭 다시 재채기, 천장 낮은 천둥, 반복을 피하는 흐름을 반복하는 원주율 활로를 찾아라. 활로를 열어라 활로가 되어라 빗소리가 비를 감싸고돈다 현대문학 2022.08
이설빈 시인 / 벌새는 거인을 불러온다 그저 맨발로 다시 맨발로 눈보다 앞서 걸어보려고 이 가망 없는 천사는 화단에 몸을 묻었다 하지만 발이 너무 많아졌다 가능과 불능의 지루한 진자운동에 미친 꽃들이 밤낮으로 걸어 다니며 화단보다 넓게 몸을 흩뿌려댔다 더는 고집부리지 않기로 했다 날개를 변명할 필요가 없으니 이제 누구든 좋으니까 너는 바보가 아니라고 말해줘 꽃들은 한 목소리로 흔들렸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새로운 봄이 새로 적어 꽂아 넣은 팻말. 그는 담장 쳐진 무덤 앞, 키 낮은 화단에 발을 묻었다. ―하루야, 그러면 안 돼. 어느새 짤막한 개가 다가와 그의 엉덩이 냄새를 맡더니 뒷발을 쳐들고 있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는 꽃가루를 훅, 불었다. 하루는 콧김을 뿜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주인을 따라갔다. 봄이 가고 있었다. 노랗게 종아리가 부푼 벌들이 허리 언저리를 바삐 오갔다. 어깨 너머로 해가 기울자 다리가 저려왔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는 바람에 기대어 화단에서 조금씩 발을 뺐다. 흙더미에 파묻힌 그의 뭉툭한 발끝에 무언가 달라붙어 있었다. 전에 없던 발가락이었다. 그가 자세히 보려고 몸을 기울이자 쨍한 이명이, 메아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새는 거인을 불러온다 헐렁하고 무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꽃들은 한 목소리로 침묵했다. 벌새는, 거인을 불러온다 작은, 더 없이 작은 바람이 입에서 몸을 불려 날아갔다. 그는 화단에 고꾸라졌다. 해가 완전히 기울자 잠이 덜 깬 앙상한 별들이 쏟아져 나와 느린 군무를 추기 시작했다. 봄은 오락가락 오늘내일했다. 무덤이 깎여나가고 담장이 쓰러지자 화단은 조각조각 넓어지고 깊어졌다. 그를 제외한 팻말들은 다 자란 발을 빼고 화단 밖으로, 다른 몸이 되어 걸어 나갔다.
어느 환한 밤. 뒷짐 진 달덩이가 그의 곁을 휘파람 불며 지나고 있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미안한데, 지금 마감 중이라 손이 없어. 어느 흐린 오후. 짤막한 하루가 화단을 헤치고 불쑥 그에게 코를 들이밀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래도 돼? 하루는 하루의 일을 했다. 일이 끝나자 주인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목줄을 당겼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파리들이 그의 짠 얼굴을 수세미처럼 핥아댔다. 장마가 지난 어느 화창한 날. 그는 어느새 그를 한참이나 위에서 굽어보는 새로운 꽃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꽃들은 거인처럼 군다. 커다란 눈에 그득한 이빨을 움직이며 저마다의 목소리로 하나같이 그에게 면박을 준다. ―천사니 화단이니, 철지난 이야기는 이제 그만둬. 그리고 벌새는 대륙에서 꿀을 빨지. 조그만 게 성질도 더러워서 여기까지 날아오지 않아. 바보가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지. 바보가 아니지. ―좋아. 다시 말해보자. 나는 바보가 아니다. ―너는, 바보가 아니다. ―아니지.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해야지. 다시. ―너는, 바보가 아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를 나로 바꿔야지. ―바보는, 내가 아니다. ―아니, 내가 아니라… 아니, 바보가 아니긴 한데… 바보야. 다 관둬! ―너는, 바보가 아니다. ―… ―너는, 바보가 아니다. 너는, 바보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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