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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명옥 시인 / 중얼거리다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15.

안명옥 시인 / 중얼거리다

 

 

희뿌연 창문으로 지나가는 뜨거운 해를

혓바닥으로 감아 들이지 못한

화분 속 수척한 이파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내 몸에 난

말라버린 이파리 몇 개를 툭 떼어낸다

 

햇빛만 비추면 사라질 이슬을 붙잡고

내 생엔 새를 넉넉하게 품을 울창한 숲이 없었지

내 중얼거림이 우물을 판다

 

누군가 내게 건초냄새가 난다고 말했지

금 간 벽을 타고 개미떼 가는 걸 바라보며

금이 간 것들은 길이 된다고 중얼거린다

 

시들어버릴 준비가 된 꽃에게 물을 주면

부러진 시간도 생기 있게 살아날까

내일의 날씨는 건기를 지나 가뭄을 예보하고

 

능선들은 달을 베어 먹으며 저녁을 데려오고

가끔 달도 나무에 기대어 쉬고 싶을 때 있지

잎사귀 떨어진 나무를 만나면 쓸쓸해지는 시간

외도는 이혼사유가 아니어도

무능력은 이혼사유 1위라는 신문을 깔고

자장면을 먹는 저녁

바람 많은 동네 내 바람개비만 돌아가지 않고

바깥보다 전등 켠 내 방안이 더 어둡다

 

하루라는 절벽을 기어올라

몸에 무덤을 달고 꽃을 피우는

아내는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월호 발표

 

 


 

안명옥 시인

2002년 《시와 시학》 봄호로 등단.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한양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수학. 시집으로 『칼』과 『뜨거운 자작나무숲』과 『달콤한 호흡』 출간. 서사시집 『소서노召西奴』, 장편  서사시집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 출간. 창작동화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 동화 『금방울전』 『파한집과 보한집』, 역사동화 『고려사』. 성균문학상, 바움문학상 작품상, 만해 ‘님’ 시인상 우수상, 김구용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