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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제니 시인 / 울고 있는 사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7.

이제니 시인 / 울고 있는 사람

 

 

 우울을 꽃다발처럼 엮어 걸어가는 사람을 보았다. 땅만 보고 걷는 사람입니다. 왜 그늘로 그늘로만 다니느냐고 묻지 않았다. 꽃이 가득한 정원 한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 누군가의 성마른 말이 너를 아프게 하는구나. 누군가의 섣부른 생각이 너를 슬프게 하는구나. 갇혔다고 닫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 밖으로 밖으로 나가세요,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너를 품어주는 것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세요. 그렇게 걷고 걷고 걷다 다시 본래의 깊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세요. 그러나 너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구나. 갈 곳이 없어 갈 곳이 없는 사람인 채로. 구석진 곳을 찾아 혼자서 울고 있구나. 구석진 곳에서 울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구나.

 

 


 

 

이제니 시인 / 보이지 않는 한 마리의 개

 

 

 ​지난날 그의 집 정원은 계절 꽃으로 가득했다. 지금은 꽃이 없는 계절이다. 계절 아닌 계절에 찾아온 누군가에게 그의 정원은 빛없는 장소이다. 봄의 화사함 혹은 여름의 무성함은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모르는 억양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한 마리의 개. 개는 보이지 않는 정원의 보이지 않는 무성함 속을 뒹굴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개의 보이지 않는 눈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본다. 시들어버린 꽃과 떨어져 나부끼는 잎과 꺾이고 부러진 나뭇가지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사람들과 흔적 없이 사라진 어제의 길들……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쓰면서, 마지막 문장은 언제나 맨 처음 쓰인 것이라고 쓰면서, 줄글은 달려 나가는 동시에 달아난다.

 

 그리고 거름 더미 위에 앉아 울고 있는 녹색. 색깔보다는 소리로 불리길 원했으므로. 다시 소리 내어 울고 있는 녹색. 그는 정원의 사잇길을 따라 걷는다. 보이지 않는 개가 그의 뒤를 따라 걷는다. 울고 있는 녹색이 보이지 않는 개의 뒤를 따라 걷는다.

 

 언젠가 아주 어린 날. 학교에 나오지 않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걷고 걸었던 길고 긴 밤길. 친구는 몇 날 며칠을 울어 부은 눈으로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슬픔에 대한 예의를 알지 못했으므로. 가만히 위로하는 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는 친구보다 더 크게 울고 울었다.

 

 그리고 다시 보이지 않는 개. 그리고 다시 속으로 속으로 울고 있는 녹색. 그는 정원의 사잇길과 사잇길을 천천히 천천히 걷는다. 부은 눈으로 자신을 달래주던 어린 날의 친구를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울고 걷고 울고 걷고. 녹색은 색깔보다는 소리로 불리길 원했으므로. 울음은 보이지 않는 개의 눈 속에 그득하였고. 보이지 않는 무성함은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맴돌고 있어서.

 

 지난날 그의 집 정원은 계절 꽃으로 가득했다. 이제는 꽃도 잎도 없는 계절이어서. 보이지 않는 개와 울고 있는 녹색이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의 뒤를 따라 걷고 있다.

 

 


 

이제니 시인

1972년 부산에서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페루〉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아마도 아프리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모르고』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가 있음. 제21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제2회 김현문학패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