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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36) 알코올 의존자를 위한 캠프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7.

[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36) 알코올 의존자를 위한 캠프

마음의 독을 빼는 숲 치료

가톨릭평화신문 2023.02.05 발행 [1697호]

 

 

 

 

흰 눈이 쌓인 산을 보면 마음속에 깊이 묻어있던 아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한 15년 전쯤 알코올 의존자의 치료를 위한 산림치유 캠프를 운영할 때다. 정신과 의사, 심리상담사, 산림치유지도사 등 연관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을 통해 숲에서 짧게는 2박 3일, 길게는 5박 6일간 몇 회기를 같이 지내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알코올 의존을 치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치료는 정신과 치료 및 병동에 수용하여 물리적인 방법으로 금주를 단행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근원적인 변화가 어렵다는 판단에서 숲의 치유능력을 활용해서 치료와 그 효과를 검증해보자는 것이었다. 전국의 알코올 의존자 모임, 치료센터, 병원 등에 등록된 참여자들을 권역별로 모아 휴양림이나 숲체원 등의 국유 산림복지시설을 활용해 캠프를 진행하였다. 예상외로 쾌나 많은 분이 지원하여 치료를 위한 절실함과 간절함이 묻어나는 캠프였다.

 

눈이 많이 내린 한 겨울날 강원도의 한 휴양림에서 진행된 캠프에서 일어난 일이다. 첫날 입소를 마치고 각자의 방 배정과 오리엔테이션 등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한 분의 참여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화장실과 온갖 곳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신발을 비롯한 모든 소지품은 그대로 있는데 참으로 묘한 일이 생긴 것이다. 휴대전화도 받지 않고, 캠프의 스태프와 휴양림 직원들이 인근 숲까지 뒤졌는데도 행방이 묘연하였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인근 시내의 모처라며 전화가 왔다. 사연인즉, 잠자리에 들어간 후 너무나 음주 충동을 못 이겨 실내에서 신는 슬리퍼를 신은 채 눈길을 두 시간 걸어 시내로 나왔다는 것이다. 나중에 면담에서 그분이 자괴감, 동료와 스태프에 대한 미안함, 단주의 결심보다 더 큰 음주의 유혹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함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캠프에 참여한 분들은 진정 자신을 바꾸고자 결심하고 노력하고 매 순간 유혹과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마음이 뭉클해진 사례도 있다. 알코올 의존자 진단을 받은 지 10년이나 되었다고 했다. 10년이란 세월을 거치며 치료시설에 갔다 왔다 하는 동안 가족들도 지쳐가고 있었다. 그날은 부부가 함께 입소하여 숲 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숲의 자연물을 통해 자기 투영을 하고자 어떤 참여자는 구부러진 나뭇가지를 어떤 참여자는 벌레 먹은 잎사귀를 찾았다. 그런데 이 부부가 숲에 들어가 자연물을 찾는 중 남편의 눈에 조그맣고 앙증맞은 솔방울 하나가 보였다. 남편은 이것을 주워 실로 묶어 말없이 부인의 목에 걸어주었다. 10년간 속만 썩이던 남편이 그래도 미안함과 사랑을 이 솔방울에 담아 목에 걸어주는 순간 모든 미움이 용서되고 이 부부의 눈물이 번져 모든 참여자가 눈물바다를 이뤘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숲이 서로의 마음을 열어주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 남편은 그 후 숲 해설가가 되어 자신의 상처로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다 안타깝게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캠프를 진행하며 무언가 진정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깊은 성찰과 변화해야 한다는 의지, 그리고 성취감을 통한 자존감의 회복이 중요함을 느꼈다. 숲은 바로 이런 과정 과정에서 힘을 발휘한다. 약물로는 한계가 있는 것들이다. 숲은 자신의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고백해도 다 들어주고 묵묵히 기다려준다. 그러면서 내가 이룬 하나하나의 활동이 성취감으로 쌓인다. 한 걸음 한 걸음 장애를 극복하듯 정상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으로 이마의 땀을 씻고, 미끄러질 듯한 바위에서 동료의 손을 잡아주며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동안의 피폐했던 자존감이 회복된다.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