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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점미 시인 / 서점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30.

김점미 시인 / 서점에서

 

 

 단 한 번 스쳐 지난 시인의 시집을 높이 꽂힌 책꽂이에서 끄집어낸다 아주 멀리서 전송되어 온 시들이 책의 낱장에서 쏟아져 내린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활자들을 손으로 받으며 그 시인의 뇌를 먹어 치운다 30일 동안 내게로 전송되어 온 먹이를 기분 좋게 핥으며 남은 활자 무더기를 주머니에 챙겨 넣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단 한 번 만나고도 오랜 기억의 보따리를 풀어놓던 시인은 내 몸 사이에 시를 쓰고 싶어 했다 톡탁거리는 손가락의 파도로 나를 간지럽히며 한 바다, 한 인간을 건너뛰어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두리번두리번 찾아 나서는 시인의 걸음마,

 

 앗! 조심해요. 그쪽 線에는 지금 생각 바이러스 침투 중!

 

 


 

 

김점미 시인 / 지구본 돌리기

 

 

몰랐지

지구본 돌려보기 전에는

마음도 역류하여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자전축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부드럽게, 쉽게

지구를 움직일 수 있지만

힘을 조금만 더 쓰면

거꾸로도 얼마든지 돌려진다는 걸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마음

돌려 세우는 것이

지구를 돌려 세우는 것과 같아서

온 힘을 모아

마음을 역류시키려 기합을 넣어보지만

손가락 끝 스치고 가는 것은

지구본일 뿐이지

지구를 돌리는 내가 아님을

마음을 돌리는 내가 아님을

정말 몰랐지

 

—시집 『한 시간 후, 세상은』 2013

 

 


 

김점미 시인

1957년 부산 출생. 부산대 독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한국해양대 유럽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2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 『한 시간 후 세상은』 (2014 도서출판 북인). 부산작가회 회원, 시인축구단 글발 회원.. ‘글발’ 공동시집 『사랑을 말하다』(2005년), 『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2012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