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미 시인 / 서점에서
단 한 번 스쳐 지난 시인의 시집을 높이 꽂힌 책꽂이에서 끄집어낸다 아주 멀리서 전송되어 온 시들이 책의 낱장에서 쏟아져 내린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활자들을 손으로 받으며 그 시인의 뇌를 먹어 치운다 30일 동안 내게로 전송되어 온 먹이를 기분 좋게 핥으며 남은 활자 무더기를 주머니에 챙겨 넣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단 한 번 만나고도 오랜 기억의 보따리를 풀어놓던 시인은 내 몸 사이에 시를 쓰고 싶어 했다 톡탁거리는 손가락의 파도로 나를 간지럽히며 한 바다, 한 인간을 건너뛰어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두리번두리번 찾아 나서는 시인의 걸음마,
앗! 조심해요. 그쪽 線에는 지금 생각 바이러스 침투 중!
김점미 시인 / 지구본 돌리기
몰랐지 지구본 돌려보기 전에는 마음도 역류하여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자전축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부드럽게, 쉽게 지구를 움직일 수 있지만 힘을 조금만 더 쓰면 거꾸로도 얼마든지 돌려진다는 걸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마음 돌려 세우는 것이 지구를 돌려 세우는 것과 같아서 온 힘을 모아 마음을 역류시키려 기합을 넣어보지만 손가락 끝 스치고 가는 것은 지구본일 뿐이지 지구를 돌리는 내가 아님을 마음을 돌리는 내가 아님을 정말 몰랐지
—시집 『한 시간 후, 세상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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