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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예 시인 / 환승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6.

이승예 시인 / 환승

 

 

장송곡이 울린다

 

담에서 피다가 화들짝 멈춰버린 왕고들빼기!

 

활짝 열리는 대문을 미친 듯이 빠져나와 달려가는 소식

 

(신의 공식1: 뒤돌아보지 않기)

 

일찍 죽은 그처럼.

 

-시집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어요’, 발견, 2020

 

 


 

 

이승예 시인 / 모넴바시아*

 

 

지진에 흔들리며, 흔들리며 다짐했나

대륙에서 떨어져 나가 물고기가 되어야지

 

돌계단을 오르다 지붕 사이로 셔터를 누르면

저문 중세의 풍경들이 화각 안으로 모여든다

 

십자가에 박힌 못 자국 속으로 지는 해를 본다

 

뺏기고 뺴앗았던 시간의 반복을 견뎌와

끝내 살아남아 피어나는 꽃들은 물고기의 꿈을

섬세하게 섬의 역사로 기록하는지

 

경건한 시간에 찾아오는 것은 오직 모넴바시아*

이곳으로의 진입은

절박하게 절벽을 걷듯 스스로 고난을 지고

저 좁은 통로를 걸어오는 당신과

저 좁은 통로를 걸어오다 되돌아가는 당신과

 

모두 차별 없이 저물어 가시지요

 

나는 하룻밤 묵으며 흔들림은

생을 조금 더 허락한 거라는 지느러미의 불립문자를 읽는다

 

간밤 내내 손바닥을 통과하여 이제 막

십자가를 뚫고 나온 못 끝이 시작이 되는 해가 밀려 나오는 일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해를 가린다

에게해 쪽으로 방향을 튼 물고기를 향해

일제히 몸을 돌려 가파르게 흔들리던 꽃잎은

오늘 무사하다

 

* 모넴바시아: 오직 하나의 입구

*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동쪽에 위치한 작은 섬

 

 


 

이승예 시인

1963년 순천에서 출생. 2015년 계간 <발견> 봄호로 등단. 시집으로 『나이스 데이』,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어요』가 있음. 2020 문학 나눔 선정. 제5회 김광협문학상 수상. 선경상상인문학상 운영위원장. 현재 계간 <발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