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연 시인 / 비폭력 대화
식도가 길어 음식이 소화될 때까지 생각이 많은 기린에게는 먼저 말을 걸기가 거북스럽다 자기만의 성대로 울음소리를 발명하니 알아듣기도 어렵다 당신이 참을성 없이 쏟아낸 말을 부드럽게 주워 담는 긴 혀와 우물거리는 입술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상대의 타액이 섞인 무자비한 말조차 시간과 함께 꼭꼭 씹을 줄 안다 기린에게도 뿔은 있다 그러나 결투를 포기한 뿔은 제 피부를 뚫고 나올 정도의 분노나 증오 같은 격렬함이 없다 그 끝은 이제 둥글고 둥글어져 고요한 우주를 닮아가는 중이다 콧등으로 미모사를 건드리면서 요리조리 아카시아 새싹을 살피면서 초식동물에 어울리는 순한 생각을 수십 번씩 접었다 펼쳐 보는 것이다 기린은 지그시 어금니에 힘을 준다 혀를 구부려 입 속 공기의 흐름을 막는 것은 말이 만드는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날 선 말이 방심한 제 앞다리를 낫처럼 썩뚝 잘라낼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 순간 불같은 성정의 자칼은 컹컹거리며 바오밥나무 둥치를 수십 바퀴째 돌고 있다 몸이 가볍고 다리 근육이 강하여 바람처럼 움직이는 이 짐승은 자신의 꼬리가 너무도 아름다운 것일까 무모한 회전을 멈출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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