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조용미 시인 / 초록의 어두운 부분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8.

조용미 시인 / 초록의 어두운 부분

 

 

 빛이 나뭇잎에 닿을 때 나뭇잎의 뒷면은 밝아지는 걸까 앞면이 밝아지는 만큼 더 어두워지는 걸까

 

 깊은 어둠으로 가기까지의 그 수 많은 초록의 계단들에 나는 늘 매혹당했다

 

 초록이 뭉쳐지고 풀어지고 서늘해지고 미지근해지고 타오르고 사그라들고 번지고 야위는, 길이 휘어지는 숲 가에 긴 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우리는 거기 앉았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처럼

 

 긴 의자 앞으로 초록의 거대한 상영관이 펼쳐졌다 초록의 음영과 농도는 첼로의 음계처럼 높아지고 다시 낮아졌다

 

 녹색의 감정에는 왜 늘 검정이 섞여 있는 걸까

 

 저 연둣빛 어둑함과 으스름한 초록 사이 여름이 계속되는 동안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다

 

 노랑에서 검정까지

 초록의 굴진을 돕는 열기와 습도로

 숲은 팽창하고

 

 긴 장마로 초록의 색상표는 완벽한 서사를 갖게 되었다

 

 검은 초록과 연두가 섞여 있는 숲의 감정은 우레와 폭우에 숲의 나무들이 한 덩어리로 보이는 것처럼 흐릿하고 모호하다

 

계간 『창작과 비평』 2022년 가을호 발표

 

 


 

조용미(曺容美) 시인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과 산문집 『섬에서 보낸 백 년』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김준성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목월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