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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우리 시대의 성인들] (8) 성 요셉 모스카티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1.

[우리 시대의 성인들] (8) 성 요셉 모스카티

1880~1927, 축일 4월 12일

환자를 주님 대하듯… 가장 작은 이들 치료하고 위로한 ‘의사 성인’

가톨릭신문 2023-04-16 [제3339호, 12면]

 

 

의사로 일하며 환자 마음 돌봐

무료로 가난한 이들 진료하고

콜레라·세계대전 때 치료에 앞장

 

 

 

요셉 모스카티 성인.

 

 

성 요셉 모스카티(Joseph Moscati)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평생 나폴리에서 병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가난한 이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던 성인이다.

“요셉 모스카티는 항상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에서 은총을 받은 그는 질병을 진단하고 질병과 관련된 분야를 이해하는 데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7년 10월 25일 모스카티 성인을 시성하면서 했던 이 말은 모스카티 성인의 일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앙 안에서 걸었던 의학도의 길

 

모스카티 성인은 1880년 7월 25일 이탈리아 베네벤토에서 판사였던 아버지 프란치스코 모스카티와 어머니 로사 사이의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6일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확고한 믿음을 물려받은 것은 유년시절뿐 아니라 모스카티의 일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었다.

 

4살 때인 1884년에 나폴리로 이사한 뒤부터 줄곧 나폴리에서 살았던 모스카티 성인은 어릴 적부터 의학에 관심을 보이던 중 1897년 나폴리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판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모스카티 성인이 의학도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뜻하지 않게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1893년 모스카티 성인이 13세 때, 그의 형 알베르토가 포병 장교로 복무하던 중 말에서 떨어지며 머리에 큰 부상을 당했다. 머리에 치유 불가능한 병을 갖게 된 알베르토는 집에서 가족의 병간호를 받으며 생활하게 됐고 모스카티 성인도 형을 돌보았다. 몇 년 동안 형을 돌보면서 모스카티 성인은 깨우친 것이 있었다.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고 효과도 제한적이기에 종교에서 오는 위로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스카티 성인은 형 알베르토를 4년 동안 병간호하며 인격적으로 성숙해졌고 신앙 안에서 의학을 공부하고자 나폴리대학 의대에 진학했지만 교회에서 운영하는 대학이 아니었던 나폴리대학의 분위기는 신앙과는 무관했다. 공공연히 불가지론이 퍼지고 있었고 성직자들에게 반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교내에는 비밀 모임들도 횡행해 나폴리대학은 젊은 가톨릭 신자에게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장소였다. 모스카티 성인은 유혹에 휩쓸리지 않으려 스스로를 경계했고 학업에 열중하면서 기도생활에 충실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할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정을 기울였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굳은 신앙심과 성실한 성품 그리고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이 합쳐져 1903년 박사학위를 받으며 우등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이때부터 모스카티 성인이 나폴리에서 펼친 의술은 가톨릭 신앙과 실제적인 자비 실천이 어떻게 한 사람의 평신도를 하느님과 결합시키는지, 그리고 하느님의 능력이 궁극적으로 의사인 모스카티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드러냈다.

 

 

나폴리 제수 누오보성당에 꾸며진 생전 모스카티의 방.

 

가장 작은 이들에게

 

모스카티 성인이 의사로 일하며 가난한 이들, 전염병에 걸려 죽을 위험에 처한 이들을 살리려 펼친 사랑의 의술은 나폴리 시민들을 감동시켰다. 그가 20대 초반 젊은 나이로부터 시작해 평생을 한결같이 헌신할 수 있었던 신앙적 바탕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자신의 형을 병간호하면서 이 정신은 이미 싹트고 있었다.

 

모스카티 성인은 나폴리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자신의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듯 치료했다. 병만 치료한 것이 아니라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마태 25,44)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환자들의 영혼까지 돌보는 일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신앙을 떠나 있던 사람들 가운데 모스카티 성인의 전인적인 치유를 접하고 신앙 안으로 다시 돌아온 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큰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그들을 무료로 진료했을 뿐만 아니라 금전적인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만나면 물질로도 도움을 주었다. 유아들의 복지향상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꾸준히 선행을 실천했다. 나폴리 중심가에 위치했던 그의 진료소에는 육체적 치유와 더불어 정신적인 위안을 얻고 싶어 하는 환자와 시민들이 항상 줄을 이었다.

 

1906년 나폴리 만 연안 베수비오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켰을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화산 피해 지역으로 달려가 환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1911년 콜레라가 창궐하자 자신도 전염될 위험에 처하면서도 전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병원 책임자로도 활약하며 부상병들을 돌보는 데 투신했다. 가장 작은 이에게 베푸는 것을 예수님께 베푸는 것과 똑같이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스카티 성인이 병자와 가난한 이들에게 지녔던 애덕의 정신은 의사로서 진료를 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끊임없이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로 인해 과중한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의학 연구에도 힘을 쏟아 3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학자로서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1911년에는 나폴리대학 화학생리학 교수로 임명됐고 이탈리아를 대표해 국제 생리학 대회에도 참석할 만큼 학자로서도 명성을 누렸다.

 

모스카티 성인은 1919년 40세가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불치병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 책임자로 임명된 뒤에도 매일 아침 미사에 참례한 뒤에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오후에는 자신의 집에서 환자들을 계속 진료했다. 1927년 4월 12일에도 평소처럼 아침 미사를 드리고 오전 진료를 마친 뒤 점심 식사를 했다. 피로가 느껴져 자리에 누운 것이 그가 선종하기 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는 선종하기까지 사회에서 주어지는 어떠한 직책이나 명예도 사양한 채 묵묵히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진료활동에 매진했다.

 

그가 선종했다는 소식은 나폴리 시내에 빠르게 퍼져 나갔고, 나폴리 시민들은 “의사 성인, 요셉 모스카티가 죽었다”고 애도했다. 모스카티의 시신이 나폴리 제수 누오보(Gesu Nuovo)성당에 안치되자 그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그의 무덤은 꽃으로 뒤덮였다.

 

모스카티 성인이 선종한 뒤 바로 그를 성인품에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모스카티 성인은 1975년 11월에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고, 1987년 10월 25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모스카티 성인의 생애는 실증주의가 학문적 풍토를 지배하던 시대에 과학과 신앙 간의 일치를 추구하고 몸소 실천했던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폴리 제수 누오보성당에 마련된 모스카티의 무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