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시인 / 무쇠 솥
양평 길 주방기구종합백화점 수만 종류의 그릇의 다정한 반짝임과 축제들 속에서 무쇠솥을 사몰고 왔다 -꽃처럼 무거웠다 솔로 썩썩 닦아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다 푸푸푸푸 밥물이 끓어 밥 냄새가 피어오르고 잦아든다 그 사이 먼 조상들이 줄줄이 방문할 것만 같다
별러서 무쇠 솥장만을 하니 고구려의 어느 빗돌 위에 나앉는 별에 간듯 큰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 솥에 닭도 잡아 끓이리 쑥도 뜯어 끓이리 푸푸푸푸, 그대들을 부르리
장석남 시인 / 해남 들에 노을 들어 노을 본다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해남 들 가운데를 지나다가 들판 끝에 노을이 들어 어찌할 수 없이 서서 노을 본다 노을 속의 새 본다 새는 내게로 오던 새도 아닌데 내게로 왔고 노을은 나를 떠메러 온 노을도 아닌데 나를 떠메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저문다 우리가 지금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저 노을 탓이다 이제는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중얼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저문다 해남 들에 노을이 들어 문득 여러날 몴의 저녁을 한꺼번에 맞는다 모두 모여서 가지런히 잦아드는 저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슴속까지 잡아당겨보는 일이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내밀어진 생의 파란 발목들을 덮어보는 일이다 그렇게 한번 덮어보는 것뿐이다 내게 온 노을도 아닌데 해남 들에 뜬 노을 저 수천만 평의 무게로 내게로 와서 내 뒤의 긴 그림자까지를 떠메고 잠긴다 (잠긴다는 것은 자고로 저런 것이다) 잠긴다
장석남 시인 / 문을 얻다
명이 다한 헌 집에 쓸 만한 문이 하나 있다는 귀띔이 있어 찾아갔더니 문이 살아 있다 떼어내 지고 왔더니 등 위에서 문은 비단구름 무리가 되어 나를 데리고 다닌다
문을 내려놓지 못해 지고 다니지 오래 나는 아무 데나 문이 되어 서 있곤 하였다
장석남 시인 / 노래가 되기는 멀었어라 1. 산골 오두막 방에서는 모과 썩는 향이 일월의 사치다 아무 올 이 없는 이 기다림은 고래(吉來)로부터의 것 언 연못을 걸어보는 것도 적막 가운데의 호사다 동지 지나서 배나무에 꽃눈이 나오기 시작이다 눈이 나오다니! 오래된 말벗들 불러 모은다 2. 어스름 지났다 급경사를 내려오는 어둠이다 오. 일월을 실눈으로 흐르는 개올물, 무심으로 장작을 쪼개니 쪼개진다 혜능의 수법이 이러했는지 웃는다 관절이 아파오고 비행기 지나는 소리가 하늘의 통증이다. 3. 아직도 저 화살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금성인가? 내 숨은 아직 좁기만 하고 나만을 겨우 먹이니 노래가 되기는 멀었어라 말벗들 다시 모으고,
장석남 시인 / 민들레
내가 밤늦도록 붙잡고 있었으나 끝내는 지워져버리고 만 몇몇 내 마음속 시구들, 그 설렘의 따스한 물무늬들을 위한
여기 호젓하고 고요한 주소지의 안타까운 묘비명들
장석남 시인 / 꽃 본 지 오래인 듯
가을 꽃을 봅니다. 몇 포기 바람과 함께하는 살림 바람과 나누는 말들에 귀기울여 굳은 혀를 풀고요 그 철늦은 흔들림에 소리 나는 아이 울음 듣고요 우리가 스무 살이 넘도록 배우지 못한 우리를 맞는 갖은 설움 그런 것들에 손바닥 비비다보면요 얘야 가자 길이 멀다 西山이 내려와 어깨를 밉니다. 그때 우리는 당나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타박타박 길도 없이 가는 곳이 길이거니 꽃 본 지 오래인 듯 떠납니다 가을은 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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