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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진규 시인 / 편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18.

정진규 시인 / 편지

 

 

 늘 危篤했다 위독이 위독을 지우면서 여기까지 왔다

 

 새가 계속 울게 되는 것도 소리가 소리를 일으켜 세우

기 때문이다 파도가 계속 치는 것도 파도가 파도의 뒷

등을 연이어 때리기 때문이다 지우기의 연속 무늬다

위독의 연속 무늬다

 

 오늘은 민박집에서 잠들지 못하고 잇다 파도소리 들리

니? 착착 접히는 파도소리라는 말은 처음이지? 접어서

착착 밤새 쌓아 올리는 파도소리 듣고 있다 높이가 없

다 지워짐의 높이 위독의 높이

 

 여기까지만 해도 나로선 길고 긴 一字上書다

 

-시집 <본색> (2004. 천년의 시작)

 

 


 

 

정진규 시인 /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다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무심코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 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정진규 시인 / 지팡이

 

 

 나무는 무릎 관절이 없다 걸어다닐 수가 없다 다리도 아프지 않은 모양이다 몇 백년을 제자리에만 줄창 서 있다 스스로 넘어지는 나무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무릎관절이 있는 나는 말이 屈伸自在(굴신자재)이지 비키고 비켜서 여기까지 왔구나 살아남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수명도 더 짧다 제자리를 지켰다 할 수도 없다 세상을 싸다닌 나의 무릎 관절이 이제 고장이 났다 박달나무에게 나무지팡이 하나를 빌렸다 사람의 슬픔엔 고장나는 관절이 있다

 

-시집 <본색> (2004년. 천년의시작)

 

 


 

 

정진규 시인 / 옛날 국수 가게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정진규 시인 / 本色

 

 

그는 굴비낚시라는 말을 쓸 줄 안다 그는 죽은 물고기를 살려낸다

그것도 이미 소금으로 발효시킨 짜디짠 조기 한 마리가

퍼들퍼들 낚싯줄에 매달린다

팽팽하다 그는 질문을 아주 잘 하려는 궁리에 골몰한다

생각의 비늘들을 번득인다

예정된 답변 말고 누구도 모르던 本色을 탄로시킬 줄 안다

이 봄날엔 나무들이 꽃으로 초록 嫩葉*들로 本色을 탄로시키고 있다

하느님의 질문엔 어쩔 수없이 정답이 나온다

 

* 嫩葉(눈엽)의 '嫩'은 어릴 '눈'

 

-시집 <본색> (2004년 천년의 시작)

 

 


 

 

정진규 시인 / 모과 썩다

 

 

 올해는 모과가 빨리 썩었다 채 한 달도 못갔다 가장 모과다운 걸, 가장 못생긴 걸 고르고 골라 올해도 제기 접시에 올렸는데 천신하였는데 그 꼴이 되었다 확인한 바로는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는 모과였기 때문이라는 판명이 났다 썩는 것이 저리 즐거울까 모과는 신이 나 있는 눈치였다 속도가 빨랐다 나도 그렇게 판명될 수 있을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을가 글렀다 일생―生 내가 먹은 약만해도 세 가마니는 될 것이다 순순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 나는 아예 글렀다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이 그토록 일찍 끝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을까 첫 사랑은 늘 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연고다 순수한 것은 향기롭게 빨리 썩는다 절정에서는 금방인 저 쪽이 화안하다 비알 내리막은 속도가 빠르다 너와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네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 싱싱한 저승내가 났다 저승내는 시고 달다 그런 연고다

 

 


 

정진규(鄭鎭圭) 시인 (1939-2017)

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마른 수수깡의 平和』 『有限의 빗장』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매달려있음의 세상』 『몸詩』 『알詩』 『도둑이 다녀가셨다』 『本色』 『껍질』 『정진규 시선집』 『공기는 내 사랑』 『사물들의 큰언니』 외 다수. 한국시인협회상, 현대시학 작품상, 월탄문학상, 공초문학상, 불교문학상, 이상시문학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 1988년부터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학(現代詩學)》 주간 역임. 2017년 폐혈증 증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