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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옥관 시인 / 숫돌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3.

장옥관 시인 / 숫돌

 

 

핏물 번진 살점 헤집으며

날뛰던 칼을

몇 방울 물로 고요히 잠재우는 숫돌

서슬 퍼런 칼날에

제 몸 선선히 내어주는 숫돌

쭈그려 칼날 벼리다보면

이제껏 온전히 날 내어준 적 없었구나

사랑이든 혁명이든

마땅히 밀어붙여야 할 뜨거운 순간에

슬며시 몸 빼 혼자 쏟은 일

어디 한두 번인가

계류의 모난 돌멩이 오래 씹어

모래알로 게워내는

하류의 강물은 아닐지라도

내 속의 숫돌 너무 거칠어 불꽃만 일으키고

이순이 되도록 시를 써도

숫돌은 다듬어지지 않네

이 거친 숫돌로 무엇을 벼릴까

틈만 나면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 끝내

주저앉힐 수도 없으면서

 

 


 

 

장옥관 시인 / 종소리 안에 네가 서 있다

 

 

조약돌 주워 호수에

 

퐁!

 

던졌더니

동그랗게 무늬가 생긴다

 

동그라미 안에 동그라미

끝도 없이 생긴다

 

종소리 같다

 

물무늬처럼 번지는 종소리

종소리처럼 번지는 내 마음

 

종소리 안에 온종일

네가 서 있다

 

 


 

 

장옥관 시인 / 밤의 커튼이 쳐진 빨래판

 

 

 다 늙은 빨래판이 측은해 서재로 가져온 게 어저께의 일이다

 이 빨래판을 어떻게 요리할까 책상 위 자판으로 올려놓고 레시피를 찾는다 주름투성이 속을 긁어내 호박범벅을 만들까 뼈다귀를 토막내 곰탕으로 고아볼까 얇게 채 썰어 생채로 무쳐 먹기엔 너무 딱딱하겠지 어쩔까 어쩔까 고민이 깊어진다

 

 아내가 탐내 자기 방으로 가져가면 어쩌나 아내의 방은 내 방과 층이 져 발 디밀 수 없는데 아내는 이미 안개의 주민이 된 듯하고 아득한 전생에 우리 빨래판에 함께 누워 본 적 있었을까 보송보송한 그 이불에선 샤프렌 향기가 났을 테지

 

 이 익숙한 주름살 앞에서 얼마 전 딸이 엄마, 하고 부른 적 있는데 그때 빨래판에서 하얗게 머리 센 장모님이 오냐, 대꾸하며 걸어 나오셨지 땟국물 속에서 삭은 한평생은 열아홉 평 신접살림에서부터 지금까지 따라온 것

 

 치대고 문지른 달력 앞에서 웃음도 울음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어떻게 돌려보낼 것인가 대략 난감에 요리 옷 입힐 궁리를 하였던 것인데 갑자기 발뒤꿈치 각질 부스스한 빨래판이 내게 여보, 하며 희미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이다

 

현대시학 2023년 5-6월호 발표

 

 


 

 

장옥관 시인 / 의자

 

​ 의자를 개처럼 끌고 다니는 사람 있을까

 

 개 대신 고독을 의자에 앉히고 진눈깨비 내린 비탈길을 내려간다 무릎이 없어서 의자에 앉을 수 없는

 슬하의 오후였다

 

 의자에 끌려가는 이를 전철에서 만났다 의자 앞에 정수리 숙이거나 변기에 기대 우는 날이 많았다

 

 개새끼 죽일 놈

 의자를 치켜들고 벌벌 떨거나 의자를 엎어놓고

 후배위로 올라타는 똥개도 보았다

 

 푹신한 소파를 꿈꾼 적은 없으나 각목으로 짠 직각의 의자, 반듯한 자세로 흐트러진 뼈를 간추리고 싶을 때는 있었다

 

 노을 속에서 등 굽은 의자가

 걸어가고 있다 기다림을 잃은 보폭이다

 

 무릎 꿇고 통성 기도하는 새벽이 아니다 손목과 발목 묶인 고문대도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을 의자로 삼은 청춘도 아니다

 

 골목에 내어놓은 의자가

 먼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는 오후다

 

 동네 개들이 찾아와 오줌을 지릴 때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는 자세, 추운 방에서 밤새 새처럼 오그려 잠든 자세

 

 허리도 굽고 하루도 굽고

 곧 쓰러질 듯 삐걱대는 저 의자에

 너는

 굽은 못을 박지마라 의자는 의자가 아니다

 

 의자가 의자로 있게 하라

-계간 『창비』 2020년 봄호 발표

 

 


 

 

장옥관 시인 /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

 

​ 태어나 보이 모태신앙인기라. 봉제사 접빈객이 헌법이고 족보가 경전인 경상도 땅인기라. 꿈에도 생각 몬 해본 배교(背敎)는 오직 분선이 이모 때문이제. 이모는 내보다 딱 한 살 더 뭇는데 분해서 분서이, 다섯째 딸인기라. 우에 히는 필선(必宣)이고, 그 우에 히는 필조(必助). 삼신할매한테 우짜든동, 우짜든동, 손바닥 닳도록 치성 드리가 얻은 아가 또 딸인기라. 낳자마자 웃목에 던져짔던 분서이는 큰히의 큰아들인 날 딴 별에서 온 사람으로 여겼을끼라. 외가 가믄 분서이 이모는 방금 낳은 알을 몰래 내 손에 쥐키줬지. 그기 새 새끼 심장메로 팔딱이는 기라.

 내가 어무이 뱃속에 들앉아 있을 때 이모는 외할매 몸에서 불안한 숨 몰아쉬었을 끼라. 부른 배 때매 사우 피해 츠마 밑으로만 댕깄다는 할매, 한 지붕 아래 뒤뚱뒤뚱 딸내미와 어매가 서로 마주치는 거도 을매나 민망시러운 일 아니었겠노. 누가 등 떠민 것도 아인데 또 아를 가진 할매, 고마 죽은 아들 손잡고 저세상으로 가시뿌고. 분서이는 뺑덕어마이 눈칫밥이 떠밀어 국민학교 졸업하자마자 대처로 떠났는기라. 큰히의 아들은, 아부지 어무이 다 잃고 교복 차림으로 난생처음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는데 이모는 주인 몰래 나왔다카미 구개진 지폐 한 장 쥐키주고 캄캄한 골목으로 사라지는기라.

 그 후에사 말해가 뭐하겠노. 우째우째 내가 얼치기 박사 따고 교수 되는 동안 이모는 나이 많은 신랑 만내 노점채소장사하다 덜컥 암종에 발목을 잡혔는기라. 여러 해 방사선에 항암제에 조리돌림 당하다 서둘러 가고 말았으이,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남자와 여자, 아니 여자와 남자 그 한 끗에 누린 것들, 당연해서 당연하다 여기고 저질렀던 것들 미안코 미안해 때늦게 신앙 고백하는기라. 수지븜 많았던 이모는 외가 삽짝 밖에 핀 분꽃을 닮았었제. 살구꽃 이파리 날리듯이 눈발 흩뿌려지는 이 겨울 아침, 난데없는 까치 울음 속으로 분서이 이모가 사부잭이 내리와 내 어깨를 다독이는기라.

 

*송재학, 『슬프다 풀 끗혜 이슬』,문학과지성사, 2019.

​-계간 『애지』 2024 여름호 발표

 

 


 

 

장옥관 시인 / 달아오른 펜촉 하나 켜들고

​ 중국 황산엔 잔도공(棧道工)이 있다지 밧줄 하나로 매달려 벼랑에 길을 낸다지 허공에 구멍 뚫고 길의 척추를 세운다지 헛발질 피해 딴생각 않으려는 생 각조차 아니 한다는데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뿔 걸고 잠드는 영양은

 

 눈 녹아 없어진 기러기 발자국일까*

 

 그해, 원고지 빈 칸에 굶주린 폭설 쏟아지고 피난민촌 파티마병원 쪽문에 붙어 허삼관 매혈기를 베꼈지 아니야 이건 아니야 몸서리치며 비루먹은 개 혓바 닥 빼문 맨드라미

 발갛게 달아오른 펜촉 하나 켜들고

 

 출항하지도 않은 검은 돛배 문 앞에 당도해 있고

 오라는 내일은 여직 아니 오고

 

*소동파의 설니홍조(雪泥鴻爪).

-월간 『현대시』 2024년 4월호 발표

 

  


 

 

장옥관 시인 / 신천은 흐르고 오리는 떠있다

 

 희망교 중동교 사이 오리 스물다섯 마리, 백로 한 마리 중동교 상동교 사이 오리 열 마리, 백로 세 마리, 왜가리 한 마리 희망교 대봉교 사이 오리 여덟 마리, 쇠백로 한 마리 수달은 없다 수달이 산다는 신천인데 한 번도 보질 못했다 그런데 희망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매일 오갔는데 모르겠다 혁명은 1960년 2월 28일에 일어났다 한평생 이 고장을 떠나 산 적이 없는데 모르겠다 오리를 세는 날이 많았다 어제는 전 직장 경리과에 근무하던 H를 집 앞에서 만났다 악수도 없이 그는 다짜고짜 말했다 장형, 여기 성서공단 와보이 고자가 억수로 많더라 총무부장도 고자고 관리부장도 고자더라 고자 만나면 삼년 재수 없고 꼭 패가망신한데이 인사도 없이 휘적휘적 사라졌다 내가 고자인 줄 눈치챈 듯했다 고자라서 제3공화국에서 제6공화국까지 한 아파트에 붙박여 살았다 신천의 청둥오리들도 고자라서 시베리아로 안 돌아가고 여름을 견디는지 모르겠다 매일 저들을 세고 있는 고자가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고자이면서 고자가 아닌 척 너를 속이고 나를 속였다 신천이 흐른다 어제 흐른 물에 파이프 박아 내일의 물로 흐르게 한 신천이다 곽상도가 어깨띠 두르고 유권자에게 손 내밀던 신천이다 물가에서 장정들이 한낮에 신문지 펴놓고 소주를 마신다 신천은 흐르고 오리는 떠있다

​-계간 『창비』 2020년 봄호 발표

 

 


 

 

장옥관 시인 / 흐린 날은

멀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가깝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풍경 때문에

보이지 않던 먼지 낀 방충망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눈 허기 때문에

놓쳤던 안경알의 지문

흐린 날은 잘 보인다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

그 행복했던 날 쏟았던 식탁보의 찻물 얼룩이나

자잔한 확신들이 놓친 사물의 뒷모습

흐린 날 눈감으면 비로소 보인다

만지면 푸석, 흙먼지 피우며 으스러질

어제의 내 얼굴조차

 

 


 

 

장옥관 시인 / 어안이 벙벙하다

 

 

 ‘어안’이 ‘어이없어 말을 못하고 있는 혀 안’에서 왔고 ‘벙벙하다’는 ‘어리둥절하여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다’에서 왔다는데, 무심코 찾아온 이 말이 정작 어디서 온 건지 왜 떠올랐는지 마냥 얼떨떨한 순간이여

 내 낡은 수첩 갈피에 어안이 벙벙한 순간 얼마나 빼곡했으며 그럴 때마다 내 속은 또 얼마나 뒤집혀졌던가 넙치 눈알처럼 벙벙한 눈빛 감추고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 모면한 일은 또한 얼마나 많았으랴

 무참하고 참담한 날들의 차마 담아내지 못한 말들 늘 입 안에 맴돌고 뱉지 못한 말 누런 가래로 목에 들러붙어 내 어눌한 쉰 목소리로 삐져나오나니

 예순 몇 해를 지금 소환해 물어보거니와

 生,

 그 한 마디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장옥관 시인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계명대학교 국문학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황금 연못』 『바퀴소리를 듣는다』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등. 2004년 제15회 김달진문학상과 2007 제3회 일연문학상,  노작문학상, 김종삼시문학상 등을 수상.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정년 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