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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관 시인 / 숫돌
핏물 번진 살점 헤집으며 날뛰던 칼을 몇 방울 물로 고요히 잠재우는 숫돌 서슬 퍼런 칼날에 제 몸 선선히 내어주는 숫돌 쭈그려 칼날 벼리다보면 이제껏 온전히 날 내어준 적 없었구나 사랑이든 혁명이든 마땅히 밀어붙여야 할 뜨거운 순간에 슬며시 몸 빼 혼자 쏟은 일 어디 한두 번인가 계류의 모난 돌멩이 오래 씹어 모래알로 게워내는 하류의 강물은 아닐지라도 내 속의 숫돌 너무 거칠어 불꽃만 일으키고 이순이 되도록 시를 써도 숫돌은 다듬어지지 않네 이 거친 숫돌로 무엇을 벼릴까 틈만 나면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 끝내 주저앉힐 수도 없으면서
장옥관 시인 / 종소리 안에 네가 서 있다
조약돌 주워 호수에
퐁!
던졌더니 동그랗게 무늬가 생긴다
동그라미 안에 동그라미 끝도 없이 생긴다
종소리 같다
물무늬처럼 번지는 종소리 종소리처럼 번지는 내 마음
종소리 안에 온종일 네가 서 있다
장옥관 시인 / 밤의 커튼이 쳐진 빨래판
다 늙은 빨래판이 측은해 서재로 가져온 게 어저께의 일이다 이 빨래판을 어떻게 요리할까 책상 위 자판으로 올려놓고 레시피를 찾는다 주름투성이 속을 긁어내 호박범벅을 만들까 뼈다귀를 토막내 곰탕으로 고아볼까 얇게 채 썰어 생채로 무쳐 먹기엔 너무 딱딱하겠지 어쩔까 어쩔까 고민이 깊어진다
아내가 탐내 자기 방으로 가져가면 어쩌나 아내의 방은 내 방과 층이 져 발 디밀 수 없는데 아내는 이미 안개의 주민이 된 듯하고 아득한 전생에 우리 빨래판에 함께 누워 본 적 있었을까 보송보송한 그 이불에선 샤프렌 향기가 났을 테지
이 익숙한 주름살 앞에서 얼마 전 딸이 엄마, 하고 부른 적 있는데 그때 빨래판에서 하얗게 머리 센 장모님이 오냐, 대꾸하며 걸어 나오셨지 땟국물 속에서 삭은 한평생은 열아홉 평 신접살림에서부터 지금까지 따라온 것
치대고 문지른 달력 앞에서 웃음도 울음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어떻게 돌려보낼 것인가 대략 난감에 요리 옷 입힐 궁리를 하였던 것인데 갑자기 발뒤꿈치 각질 부스스한 빨래판이 내게 여보, 하며 희미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이다
현대시학 2023년 5-6월호 발표
장옥관 시인 / 의자
의자를 개처럼 끌고 다니는 사람 있을까
개 대신 고독을 의자에 앉히고 진눈깨비 내린 비탈길을 내려간다 무릎이 없어서 의자에 앉을 수 없는 슬하의 오후였다
의자에 끌려가는 이를 전철에서 만났다 의자 앞에 정수리 숙이거나 변기에 기대 우는 날이 많았다
개새끼 죽일 놈 의자를 치켜들고 벌벌 떨거나 의자를 엎어놓고 후배위로 올라타는 똥개도 보았다
푹신한 소파를 꿈꾼 적은 없으나 각목으로 짠 직각의 의자, 반듯한 자세로 흐트러진 뼈를 간추리고 싶을 때는 있었다
노을 속에서 등 굽은 의자가 걸어가고 있다 기다림을 잃은 보폭이다
무릎 꿇고 통성 기도하는 새벽이 아니다 손목과 발목 묶인 고문대도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을 의자로 삼은 청춘도 아니다
골목에 내어놓은 의자가 먼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는 오후다
동네 개들이 찾아와 오줌을 지릴 때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는 자세, 추운 방에서 밤새 새처럼 오그려 잠든 자세
허리도 굽고 하루도 굽고 곧 쓰러질 듯 삐걱대는 저 의자에 너는 굽은 못을 박지마라 의자는 의자가 아니다
의자가 의자로 있게 하라 -계간 『창비』 2020년 봄호 발표
장옥관 시인 /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
태어나 보이 모태신앙인기라. 봉제사 접빈객이 헌법이고 족보가 경전인 경상도 땅인기라. 꿈에도 생각 몬 해본 배교(背敎)는 오직 분선이 이모 때문이제. 이모는 내보다 딱 한 살 더 뭇는데 분해서 분서이, 다섯째 딸인기라. 우에 히는 필선(必宣)이고, 그 우에 히는 필조(必助). 삼신할매한테 우짜든동, 우짜든동, 손바닥 닳도록 치성 드리가 얻은 아가 또 딸인기라. 낳자마자 웃목에 던져짔던 분서이는 큰히의 큰아들인 날 딴 별에서 온 사람으로 여겼을끼라. 외가 가믄 분서이 이모는 방금 낳은 알을 몰래 내 손에 쥐키줬지. 그기 새 새끼 심장메로 팔딱이는 기라. 내가 어무이 뱃속에 들앉아 있을 때 이모는 외할매 몸에서 불안한 숨 몰아쉬었을 끼라. 부른 배 때매 사우 피해 츠마 밑으로만 댕깄다는 할매, 한 지붕 아래 뒤뚱뒤뚱 딸내미와 어매가 서로 마주치는 거도 을매나 민망시러운 일 아니었겠노. 누가 등 떠민 것도 아인데 또 아를 가진 할매, 고마 죽은 아들 손잡고 저세상으로 가시뿌고. 분서이는 뺑덕어마이 눈칫밥이 떠밀어 국민학교 졸업하자마자 대처로 떠났는기라. 큰히의 아들은, 아부지 어무이 다 잃고 교복 차림으로 난생처음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는데 이모는 주인 몰래 나왔다카미 구개진 지폐 한 장 쥐키주고 캄캄한 골목으로 사라지는기라. 그 후에사 말해가 뭐하겠노. 우째우째 내가 얼치기 박사 따고 교수 되는 동안 이모는 나이 많은 신랑 만내 노점채소장사하다 덜컥 암종에 발목을 잡혔는기라. 여러 해 방사선에 항암제에 조리돌림 당하다 서둘러 가고 말았으이,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남자와 여자, 아니 여자와 남자 그 한 끗에 누린 것들, 당연해서 당연하다 여기고 저질렀던 것들 미안코 미안해 때늦게 신앙 고백하는기라. 수지븜 많았던 이모는 외가 삽짝 밖에 핀 분꽃을 닮았었제. 살구꽃 이파리 날리듯이 눈발 흩뿌려지는 이 겨울 아침, 난데없는 까치 울음 속으로 분서이 이모가 사부잭이 내리와 내 어깨를 다독이는기라.
*송재학, 『슬프다 풀 끗혜 이슬』,문학과지성사, 2019. -계간 『애지』 2024 여름호 발표
장옥관 시인 / 달아오른 펜촉 하나 켜들고 중국 황산엔 잔도공(棧道工)이 있다지 밧줄 하나로 매달려 벼랑에 길을 낸다지 허공에 구멍 뚫고 길의 척추를 세운다지 헛발질 피해 딴생각 않으려는 생 각조차 아니 한다는데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뿔 걸고 잠드는 영양은
눈 녹아 없어진 기러기 발자국일까*
그해, 원고지 빈 칸에 굶주린 폭설 쏟아지고 피난민촌 파티마병원 쪽문에 붙어 허삼관 매혈기를 베꼈지 아니야 이건 아니야 몸서리치며 비루먹은 개 혓바 닥 빼문 맨드라미 발갛게 달아오른 펜촉 하나 켜들고
출항하지도 않은 검은 돛배 문 앞에 당도해 있고 오라는 내일은 여직 아니 오고
*소동파의 설니홍조(雪泥鴻爪). -월간 『현대시』 2024년 4월호 발표
장옥관 시인 / 신천은 흐르고 오리는 떠있다
희망교 중동교 사이 오리 스물다섯 마리, 백로 한 마리 중동교 상동교 사이 오리 열 마리, 백로 세 마리, 왜가리 한 마리 희망교 대봉교 사이 오리 여덟 마리, 쇠백로 한 마리 수달은 없다 수달이 산다는 신천인데 한 번도 보질 못했다 그런데 희망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매일 오갔는데 모르겠다 혁명은 1960년 2월 28일에 일어났다 한평생 이 고장을 떠나 산 적이 없는데 모르겠다 오리를 세는 날이 많았다 어제는 전 직장 경리과에 근무하던 H를 집 앞에서 만났다 악수도 없이 그는 다짜고짜 말했다 장형, 여기 성서공단 와보이 고자가 억수로 많더라 총무부장도 고자고 관리부장도 고자더라 고자 만나면 삼년 재수 없고 꼭 패가망신한데이 인사도 없이 휘적휘적 사라졌다 내가 고자인 줄 눈치챈 듯했다 고자라서 제3공화국에서 제6공화국까지 한 아파트에 붙박여 살았다 신천의 청둥오리들도 고자라서 시베리아로 안 돌아가고 여름을 견디는지 모르겠다 매일 저들을 세고 있는 고자가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고자이면서 고자가 아닌 척 너를 속이고 나를 속였다 신천이 흐른다 어제 흐른 물에 파이프 박아 내일의 물로 흐르게 한 신천이다 곽상도가 어깨띠 두르고 유권자에게 손 내밀던 신천이다 물가에서 장정들이 한낮에 신문지 펴놓고 소주를 마신다 신천은 흐르고 오리는 떠있다 -계간 『창비』 2020년 봄호 발표
장옥관 시인 / 흐린 날은 멀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가깝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풍경 때문에 보이지 않던 먼지 낀 방충망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눈 허기 때문에 놓쳤던 안경알의 지문 흐린 날은 잘 보인다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 그 행복했던 날 쏟았던 식탁보의 찻물 얼룩이나 자잔한 확신들이 놓친 사물의 뒷모습 흐린 날 눈감으면 비로소 보인다 만지면 푸석, 흙먼지 피우며 으스러질 어제의 내 얼굴조차
장옥관 시인 / 어안이 벙벙하다
‘어안’이 ‘어이없어 말을 못하고 있는 혀 안’에서 왔고 ‘벙벙하다’는 ‘어리둥절하여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다’에서 왔다는데, 무심코 찾아온 이 말이 정작 어디서 온 건지 왜 떠올랐는지 마냥 얼떨떨한 순간이여 내 낡은 수첩 갈피에 어안이 벙벙한 순간 얼마나 빼곡했으며 그럴 때마다 내 속은 또 얼마나 뒤집혀졌던가 넙치 눈알처럼 벙벙한 눈빛 감추고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 모면한 일은 또한 얼마나 많았으랴 무참하고 참담한 날들의 차마 담아내지 못한 말들 늘 입 안에 맴돌고 뱉지 못한 말 누런 가래로 목에 들러붙어 내 어눌한 쉰 목소리로 삐져나오나니 예순 몇 해를 지금 소환해 물어보거니와 生, 그 한 마디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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