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주 시인 / 바다횟집
그 집은 바다를 분양받아 사람들을 기다린다 싱싱한 물살만을 골라 뼈를 발라 놓고 일 년 내 등 푸른 수평선을 별미로 내놓는다 손님이 없는 날엔 주인이 바다의 서랍을 열고 갈매기를 빼 날리며 마루에 앉아 발톱을 깎기도 하는 여기엔 국물이 시원한 노을이 매일 물 위로 건져 올려지고 젓가락으로 집어먹기 좋은 푸른 알들이 생선을 열면 꼭 차 있기도 한다. 밤새 별빛이 아가미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그물보다 촘촘한 밤이 되어도 주인은 바다의 플러그를 뽑지 않고 방안으로 불러들여 세월과 다투지 않고 나란히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한다 깐 마늘처럼 둘러 앉아 사발 가득 맑은 물빛들을 주고받는다
김경주 시인 / 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
시 때문에 죽고 살 일은 없었으면 하는데 자꾸 엄마는 시를 놓으라고 울고 나는 고양이를 울린다 자꾸 시 가지고 생활을 반성하는 놈 좀 없었으면 하는데 시 때문에 30분을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도 참혹해지고 시 한 편 발표하고 나면 몰래 거리에 쓰레기 봉지를 두고 온 기분이 든다
시 때문에 살 일 좀 생겼으면 하는데 사형수가 교수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뒤따라오는 간수들에게 갑자기 자꾸 밀지 말라고 울먹이는 광경처럼
밀지도 않는데 떠밀리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시만써서 이대로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시 때문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오래 시 안쓰다가 다시 쓴다는 놈 생각 좀 하고 다시 쓴다는 놈치고 세상의 속물 다 겪은 후 오만하게 돌아온 것 못 봤다 그게 시의 구원이라면 시 때문에 형편없는 연애라도 그만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도 해보지만 시 때문에 죽어서도 까불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따지고 볼 것도 없이 신파란 내 쪽에서 먼저 부러우면 지는 법이다 이기고 지고 살 일도 아닌데 시 때문에 이름 없는 무덤 옆에 가서 잠도 자 보았다
시 때문에 울먹이는 일 좀 없었으면 하는데 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
김경주 시인 / 대필(筆)
일기를 대신 써 준 적 있고 군대를 대신 가 준 적도 있다
주인이 떠난 폐가의 마루 냄새를 맡고 밤이면 이름이 없는 먼 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를 혀에 굴리다가 죽은 바람은 자신의 장례를 단 한 줄의 밀사라고 불렀다
김경주 시인 / 한때 나는 사공이 되고 싶어 운 적이 있다
한때 나는 사공이 되고 싶어 운 적이 있다 하루에 꼭 두 번씩만 물을 저어 이 나루에서 저 나루까지만 내 생을 미루고 싶었다 노를 저어 물속의 물렁물렁한 힘들을 밀며 나는 아주 천천히 사람을 나르면서 살고 싶었다 노를 젓다가 배가 지나간 자리 위에 물속으로 들어간 물이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는 것을 등을 돌아 바라보며 건너가는 것들의 체온이 뜨겁게 나를 앞으로 밀고 있음을 하루에 꼭 두 번씩만 내 몸에서 밀어내고 싶었다 바람이 물속까지 깊은 날이면 나는 손을 흔들어 어두운 마음을 옆에 앉히고 물속으로 길고도 지루한 초행을 하고 싶은 적도 있었다 손님이 없는 날이면 노을이 물 밖에서 사구의 색으로 묽어질 때까지 배를 비끄러이 매어두고 나는 이번 생을 다음 생까지 끄덕끄덕 졸면서 가고 싶었다 누군가 툭 나를 건드렸다면 그건 사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물 안을 지나가는 저녁의 그늘처럼 그 그늘이 물 밖으로 올라오며 우는 시간을 지켜보는 마음의 미온이 되었다 하나의 물이 저쪽을 갔다가 이쪽으로 오는 데에도 한 생이 다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알 것 같다 내가 물 안으로 던져두었던 그 수많은 돌들의 색깔이 가장 늦은 저녁에 가서야 물속에서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늙은 노를 면에 쌓아 안고 자는 사공의 마음을 가장 늦은 사랑이 필요하리라는 것도 알 것 같다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가서야 물이 된다는 그 인생의 기온에 대해서 이제 나는 단 한 줄의 수분이라도 몸속을 저어가야 가야한다는 것을, 내 몸을 더 깊은 물 쪽으로 무겁게 밀어내는 그 노의 물기들을. 한때, 나는 사공이 되고 싶어 운 적이 있다
김경주 시인 / 몽상가 -날아가는 새가 사람의 머리카락을 물고 가면 그 사람은 밤에 날아다니는 꿈을 꾸게 된다*
긴 머리를 자르기 위하여 긴 머리를 자르기 위하여 밤을 나선다 밤에 머리를 자를 만한 곳이 없다고 수첩에 옮긴다 나는 비스마르크 제도에 사는 초록파푸아 달팽이의 느린 생을 이야기하고 싶다 맥주 거품 같은 구름이 근원에 홀린 듯 떠 있는 밤. 생은 먼 데서 흘러오고 나는 벼락이 수천 년 전부터 하늘 속을 흐르다 찾아온, 숲 속 가장 어두운 나무의 눈을 떠 올린다
맥주의 매복지 맥주를 사러 가기 위해 우리는 방 안에 매복해 있었다 게릴라처럼 우리는 웃었고 게릴라처럼 우리는 코피를 흘렸다 그러나 게릴라처럼 매복지에서 죽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맥주를 사러 가기 위해 일어났다 누군가 창문 앞에서 인생이라는 혐의를 벗어나고 싶어라고 말했으나 그는 곧 우리가 '입술 깨물기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했으므로 검은 라이방을 쓰고 몇 개의 검은 종이학을 탁자 위에 접어놓았다 그러곤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음악을 살리기 위해 우리는 조금씩 떨면서 땔감처럼 푸르고 축축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는 음악을 향해 날아온 섬도 있었고 '한 번도 우리는 그 섬에 가본 적이 없었고' 코레아의 감나무에 매달린 칠레 사내의 칠레 같은 푸른 발목도 있었다 달팽이의 입술을 가진 청년이 몰래 안아서 집으로 훔쳐온 '책 읽는 소녀 동상'도 있었다
물속에서 건져올린 머리칼 당신들은 한패로군 저녁마다 서로 말을 나누는 사이임에 틀림없어 그녀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감겨주었던 세숫대야를 찾고 있다고? 미안하지만 이 가게에 그런 건 없어. 이보게 그런데 거울을 좀 보도록 하게. 자네는 지금 담배를 거꾸로 물고 있지 않은가. 휴일엔 가끔 혼자서 십자가를 뒤집어놓고 방에 앉아 쓸쓸한 칼을 갈기도 하는 거야. 이런 당신들은 정말 한패로군 내 새장의 새들이 입을 열지 않아 오늘도 밤을 샐 모양이군.
연두색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엔 무시무시한 침묵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영혼에 처벌 받을지 모르지만 시체를 사랑해서 묻지 못하는 사제처럼 불가능한 영혼을 꿈꾼다 환영에 습격받은 자로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몇천 년 전부터 살았던 바람이 내 머리칼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로 시작되는 연기가 연두색 담배의 끝물에서 흘러나온다
기타를 맨 잠수부 용기를 얻기 위해 창가에서 나는 조용히 침대로 간다 비가 오는데 창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수첩에 옮긴다 무서워서 으으으 나는 입이 거의 돌아가는데 머리를 자르기 위해 밖에 나가야 하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나는 시조새처럼 꾸루룩거리며 날개를 바닥에 펼쳐놓고 타이핑을 하지 기타를 멘 잠수부들이 강물 속에서 또 음악을 연주하는군. 수면으로 뽀글뽀글 올라오는 음악의 냄새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새들이 어디선가 주워온 머리칼을 물고 내 노래 위에도 앉아 있지
* 중국 고전 '박물지'의 한 구절.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김경주 시인 /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든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방 곳곳에 남아 있는 얼룩이 그를 어룽어룽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지하에 붉은 열을 내려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임희구 시인 / 밥줄 외 5편 (0) | 2025.07.06 |
|---|---|
| 이면우 시인 / 노천시장 외 5편 (0) | 2025.07.06 |
| 최향란 시인 / 추억 외 5편 (0) | 2025.07.06 |
| 하명환 시인 / 인사동 포구 외 5편 (0) | 2025.07.06 |
| 이병국 시인 / 냉담 외 5편 (0) | 2025.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