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용 시인 / 복숭아
달이 몰락한 골목에서 떨어진 유년을 줍는다 술 취한 사내가 더위에 끌려가는 언덕배기 복숭아를 담은 봉지가 비틀거린다 보름달을 따왔노라고 소리치며 귀가한 아버지 물컹한 복숭아를 잠든 내 입에 물리곤 까칠한 턱수염을 볼에 비볐다 얼큰하게 술이 오른 얼굴만큼 불그레한 복숭아 복숭아 과육이 배여 나온 진득한 기억은 머릿속에 포스트잇처럼 붙었다가 여름이면 밤하늘을 물끄러미 보게 했다 그 해 별은 왜 그리 반짝이던지, 별이란 별은 죄다 당신별이라 했다 별을 유난히 좋아해서 복숭 씨 같은 별을 삼키고 울대에서 키우길 서너 달, 아버지는 북쪽 하늘에 점지해 둔 별자리로 갔다 복숭아 밭뙈기 몇 마지기 살 돈을 왜 병원에 주느냐고 버틴 건 순전히 나 때문 늦은 귀가도 별을 사랑한 것도 다 자식을 위해서였다 학명에도 없는 복숭아 별자리가 내 기억 속에 들어서고 아버지와 나만 아는 밤하늘에 복숭아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제11회 복숭아 문학상 시부문 대상 작품
전선용 시인 / 이분법에 관하여
신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것은 치명적 과실이다 사람이 자웅동체가 아니라서 편을 가르는 못된 습성, 알몸이 부끄러워 생식기를 가린 뒤, 등 돌리고 자는 아내도 적으로 치부됐다 피아彼我 가려내는 후각이 진화해 탐지견이 된 사람들, 꽃 피고 지는 일이 수류탄이라서 과실을 심는 구호에 파편이 튄다 착암기 소음 같은 청각이 괴로워 우리 입에 마스크를 씌운 신의 한 수 생선 대가리 같은 머리에 반복의 죄가 비늘처럼 날려 고립은 난파선이 됐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몰라야 하는 불문율은 깨지고 주먹을 먼저 쓰는 불화가 번져 마을은 깜깜하다 가슴이 없는 머리에 뿔을 달아줄까 우리의 십자가가 앞마당 평상보다 좁다 하늘의 별까지 네 별 내 별로 나누는 족속, 무리를 벗어난 외로운 별 하나 지리산 골짜기로 흐른다 -시집 <그리움은 선인장이라서> (생명과문학, 2023)
전선용 시인 / 독종 흡입력 좋은 입으로 무형의 죄를 먹은 사람들이 노을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데요 사실은 지구가 편도염 때문에 목젖이 부은 겁니다 노동자 임금을 빨아먹은 빨대가 어쩌면 저렇게 당당하게 떠다닐 수 있을까요? 속이 빈 것은 요란합니다 빨리 취하고 싶은 사람은 소주를 마실 때 빨대를 꼽기도 하지요 취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불법에도 과감해집니다 고래가 죽었다는 보고서를 먹이사슬이 바뀌었다는 말로 이해하면 포식자가 빨대인 것을 알게 됩니다 빨대가 독해지면 끝을 벼리고 막 달려드는데요 한 구의 고래시신이 해변으로 떠밀려올 때 지구 목구멍이 원숭이똥구멍 같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전선용 시인 / 미녀이거나 마녀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봤다는 말은 기망(欺妄)이다 양귀비가 가진 힘이 중독성이라면 아편은 지옥문이 열리는 무덤, 손톱 밑에 혀를 밀어 넣고 독을 빠는 동안 별은 창틀에 끼어 급사했다 황홀하게 익숙한 밤 마법에 걸린 연애 습성은 마약과 같다 점 하나를 숨기고 유유히 바다로 간 미녀 해무가 그녀라는 소리가 있고 수평선이 그 여자라는 전설이 있다 파랑을 견뎌낸 섬 환락의 껌을 씹는 마법은 착란이었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계(界) 문장의 비문처럼 난해한 점의 출처가 사내에겐 못이 됐다 저기 점 박힌 여자, 여기 못 박힌 남자, 꽃 지고 난 자리 시체 투성이다
-시집 『그리움은 선인장이라서』, 생명과문학사, 2023.
전선용 시인 / 폭설
잔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금세 푹푹 잠기는 세상것들 까불다가 식겁하고 있다 하긴 하늘도 많이 참았지 달콤한 잔소리는 고분고분 들어야 한다 술 먹느라 늦게 귀가한 죄 스리슬쩍 거짓말 한 죄 남을 험담한 죄 다 내새끼라고 허물을 덮어주시는 아량 죄가 많을 수록 잔소리가 두툼하다
전선용 시인 / 버찌
벚꽃이 낙하하고 얼마 뒤 버찌가 떨어졌다
말하자면 벚꽃은 전조증상 팔랑개비 같은 꽃잎은 쓸려갔지만 버찌는 콘크리트 바닥에 할 말을 거뭇 거뭇 남겼다
그들만의 언어로 보도블록에 눌러앉은 종족의 유서들 스타카토같이 찍힌 무성한 말 줄임 대를 잇는 증표다
잘 살아라,
아버지가 남긴 호흡도 내게 거뭇거뭇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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