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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백소연 시인 / 청동 거울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10.

백소연 시인 / 청동 거울

 

 

유품처럼 받아온

파란 녹이 슨 반상기를 닦는다

전신 에워 싼 푸른 멍

오래된 시간 몰래 훔쳐 먹었던 걸까

시간은 거울인데

유년을 담은 밥사발 유독 커 보인 하루

뒷마루에 앉아 매매 놋그릇 닦던

어머니의 바쁜 손길 기와가루로 묻어 나온다

짚수세미 둥글게 말아 푸르뎅뎅한

안팎 닦아내던 녹이 슨 시간

정성 깃들지 않으면

제 내면도 돌이끼 낀다고

거울 닦듯 한생 닦고 또 닦아내

어머니, 백발 된 노정 느즈막이

내가 닦아 올린다

 

 


 

 

백소연 시인 / 시간은 추鰍를 초월한다

 

 

 능소화 왼발바닥에 깨진 유리 글자 꽉 박혀 산다 ‘손대지 마시오’ 벽보아래 누구의 도살인가 도화살인가 아직 피지 못한 꽃몽 대롱대롱 매달려 種은 울리고 鐘은 울린다

 

 잘 익은 시간은, 채도와 명도 통째 저장된 빛의 보색 대비 프로방스의 야경내지 스누피의 미소였을까 맺혔다 풀어짐도 내내 꽃 피우는 것만 아니어서 십자 생 초초 뜬눈 같은 곡절 여러 갈래 길을 낸다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 제 삼시에서 제 구시까지 등 뒤 음양, 예수는 끝끝내 천지간 휘장 찢어 마침내 조종弔鐘을 울렸을까 십자 생은 종국에 씨앗 된 사랑이므로 다 이루었다, 마침내 어둠 뚫고 나온 천천 눈 만만 촉! 시간은 추鰍를 초월한다

 


 

백소연 시인 / 수화

 

 

거미 똥구멍 같은 그녀 손가락이

곡예를 하듯 그물망을 펼친다

그 곁에 또 한 여자 뚫린 망에 고개를 처박고

진청색 퀭한 바다를 내려다본다

밤마다 등푸른 고래를 낚던 손가락 자수가

상처를 덮느라 배회하는 난간 교차로,헛손질한

구멍 뚫린 시간과 실랑이 치던 중년여자들

석자 쯤 늘어진 사내의 목선 슬슬 풀어

사슬 무늬 생사 촘촘히 새겨넣는다

눈에 띈 신기루를 낚다 낮술에 취해

심연에 수놓인 그 사내의 향유고래를 방생해 버린 걸까

손 뻗쳐도 닿지 못해 허덕일 때마다 말 고리를 잡은

수난사 몇 소절 궁시렁궁시렁 허방에 홀맺힌다

한평생 뒤집어진 문양을 다듬다 무릎에 뉘인

실밥,투욱 분질러진 울음 몇 마디 부스러져 나온다

사활을 건 일상 얼키설키 새겨 엮어야만

제 몸에 걸맞는 한 사내의 의복이 되는 기막힌 길

천만사 끊고 맺은 블랙홀 닫혔다 열린다

넌지시 환부를 들춰 취기 밴 생 거슬러 오르던

그녀들 손끝도 종국엔 바다가 된 걸까

고리걸어 빼낸 생사 가닥 술술 풀어 잇댄다

 

 


 

 

백소연 시인 / 날개달린 고양이

 

 

수배당한 고양이가 골목을 누벼요

희고 검은 털과 발톱을 가진 날렵한 놈이지요

이름이 무엇인지,어디에서 흘러왔는지

당최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기름진 털을 곤두세우고

장미아파트를 들락거리는 고 앙큼한 눈이라니

담보대출로 키가 낮은 오래된 주택을

제 집처럼 영민하게 넘나든 지 꽤 오래지요

편도2차선 차도 건너 빠리 바게트를 에돌아

현대아파트 희붐한 담 위에 도사리고 앉았네요

다듬어지지 않은 발톱을 목격한 사람들은

육식만 고집한 탓에

달콤한 생은 꿈도 꾸지 못한다고

발이 빠른 유전자를 의심하곤 한다는 데요

옆집 생달이 엄마는 발톱 자국을 보며

샤를 페로의 장화 신은 고양이를 상상해요

키득키득 하루해가 뒤바뀌기도 전

무이자 담보대출 무산,과속 과태료 비보가 날아드네요

고양이와 나,나와 고양이

가난한 옷걸이에 살인적 죽음이 걸려있지만

양면의 날에 다칠 수 없어 그까짓 것

영민한 걸음으로 담을 날아오릅니다

맨바닥에 납작 배를 깔고

 

 


 

 

백소연 시인 / 안개주의보

 

 

속도에 매달린 빛의 뒷면

직진을 가로막았다

이른 는개인가 싶었는데

사방 연속무늬로 번져나가는 안개다

백미러를 휘감친 무형의 손 느닷없이

내 직관을 몽땅 삼켜버렸다

핏기 한 방울 없는 수척한 얼굴

딱 맞닥트릴 때마다

얼마나 많은 생 불시착 된 것인지

미처 길 안쪽을 감지 못한

내리막길의 급브레이크 소리

생생 고막을 찢는다

누구도 길의 체온 쉽게 읽어내지 못해

무시로 넘나드는 궤도 이탈,

굴곡이 심한 생사 그림자가 나를 바싹 뒤쫓고 있었던 걸까

아무런 기미조차 눈치채지 못할 때

안개는 낮게 더 낮게

포복하고 있었다

길이 있어도 통과할 수 없는 길 있어

벼랑 끝을 걷듯

속도의 체감 온도는 시방 제로다

 

 


 

 

백소연 시인 / 호랑가시나무 눈

 

 

절정을 향해 치솟6는 나무의

날카로운 이빨 엎드려 있다

잎과 잎의 어긋난 광택

그 오랜 내력을 품은 겨드랑이 속에

느슨해진 삶을 잡아당긴

무수한 바늘들 꽂혀 있다

 

살얼음 낀 바람의 밭은 기침소리 밑에

죽은 듯 배를 깔고 누운 뿌리들은

해풍에 부딪혀도 목 고대만 까딱거릴 뿐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는다

 

제 가시에 찔린 상처 버텨내기란

또 얼마나 많은 구부러진 생을 잘라내야 했을까

길은 꺾어가도 휘돌아 와도 아픔인지

묵은 가지에 손을 얹으면 바람이 살다간 등때기

건들릴수록 따끔,따끔하다

 

혈기를 드러낸 채

완강하게 버틴 바람 끝점에 서서

꼿꼿한 발톱만 유일한 무기가 되었을 리 만무하다

바닥까지 철퍼덕거리는 해일을 집어삼킬 듯

날카로운 입 속의 이빨

눈 부릅뜨고 섰다

 

 


 

백소연 시인

전북 임실 출생. 미국 California Union University음악대학 종교음악과(피아노전공) 졸업 및 Viola 대학 연수과정을 수료, 광주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과(피아노전공) 및 고려대학원 문학석사 졸업.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바다를 낚는 여자』 『페달링의 원리』 등. 시나리오: 『궁안의 연꽃』 집필. 『월간 아동문학』 운문부 신인상 수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 『대한민국월간아동문학상』 수상. 현)시인, 극작가, 칼럼니스트 외 뮤지션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