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한연순 시인 / 서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13.

한연순 시인 / 서시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가끔씩 짐승들의 발자국에 놀라

작은 돌들이 흘러내리는 소리들과

나무들이 바람에 우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

종일 산나물 뜯던 할머니는 코를 골며

아랫목에서 어둠을 흔드는데

잠은 점점 오지 않고

방고래가 막혔는지 밍밍한 윗목에서 꿈을 꾼다

눈만 감고 있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촛불을 켠다

손전등을 켜고 밖으로 나오니 초승달은 먼 길 떠나고

소나무 가지사이에는 어둠만 푸르다

물소리를 따라 강가로 걸어가니

밤새 배터리를 돌리며 고기를 잡던

투망꾼들이 차안에서 숨죽인다

어둠을 둘러싼 환한 별들이 머리 위까지 내려와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것 같다

주먹만한 북두칠성이 실한 과일처럼 어둠속에서

가라앉은 내 마음을 황금빛으로 흔든다

별천지에 홀로서서

침묵하던 나와 해후를 한다

그립고 그립던 이런 밤이

달콤하고 향긋하게 내 곁으로 다가와

작은 새처럼 치악산의 밤을 운다

가슴이 은사시나무처럼 열린다

좀 더 기운을 차려봐야겠다

요즘 나는 詩와 조금 소원하다

어떻게 화해할까

 

-시집 <돌담을 쌓으며> 에서

 

 


 

 

한연순 시인 / 돌 속에서 피는 꽃

 

 

집터 작업을 위해 골라낸 돌들

몇 년째 앞마당 한쪽에 쌓아 두었다

 

언제부터인가

삐닥하게 기울어진 자세들이

중심 잡으려 꽃을 피워올린다

 

별빛 내려오면 별꽃이 피고

달빛 내려오면 달맞이 꽃 피고

빗물 내려오면 불봉선 핀다

 

내팽개쳐진 날들이 스스로

일어서고 있다

 


 

한연순 시인 / 시인부락

 

 

영흥도 십리포에 가면

삶이 휘어지도록 아파 본

소사나무가 있네

속살까지 늙은

그 시인이

꽃대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노래하네

고뇌의 뿌리에서 올라 온

바람의 각(角)을 나부끼네

 

-시집 <공기벽돌쌓기놀이>

 

 


 

 

한연순 시인 / 아무것도 아닌 저녁

 

 

똥을 빼지 않은 멸치볶음을 먹다가

똥이 맛있다는 생각으로 저녁을 먹는데

 

죽은 멸치가 뼈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할 말이 있는 거니

 

풍장이 된 빨간 금붕어가

베란다 화분 위에서 거실 안을 보고 있는 시간

 

접시 안에 많은 눈들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아직 할 말이 살아있는 거니

 

누가 느낌표처럼

앰뷸런스 소리로 떠나가고 있어

 

따뜻한 체온과 반응하는 것들은

어디로 가 버린 거니

 

- 계간 《예술가> 2023년 가을호

 

 


 

 

한연순 시인 / 외나무다리에서

 

 

기린과 사자가

만났을 때

가던 길을 멈추고

두려움을 외나무다리에 단단히 의지한 채

먼저 서로의

눈을 찬찬히 바라봐야 한다

누가 더 아픈지

슬픈지

위태로운지

그래야

둘 다 산다

 

 


 

 

한연순 시인 / 검은 입 속의 흰죽

 

 

 

아 타 버린 이승이었구나

입 안이 숯이다

 

뼈만 남은 어머니는 몸에 열이 난다며

굴곡진 삶을 벗어던지듯

자꾸만 옷을 벗어 버렸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다

훨훨 새가 되고 싶은 거다

검은 입 속의 흰죽,

 

죽을 떠 넣어 주는 오래된 사위에게

마지막 기운을 내어 말을 남겼다

이런 모습 미안하네

검은 입 속의 흰 죽,

 

―시집 『분홍 눈사람』, 예술가, 2021

 

 


 

한연순 시인

전북 정읍 출생, 전주교대, 인천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2000년 월간 《조선 문학》 시부문 등단. 시집 『방치된 슬픔』 『공기벽돌 쌓기 놀이』 『돌담을 쌓으며』 『분홍 눈사람』. 조선시문학상, 인천PEN문학상 수상. 2021년 인천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