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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동남 시인 / 폭염특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14.

박동남 시인 / 폭염특보

 

 

빛이 한반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물그릇에 담긴 구름이

 

불볕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금방 물 먹은 스펀지가 된다

 

알몸으로 덤벼드는 빛에 살인은 잔인하다

밀짚모자에 감춘 양계장 주인의 눈물

밭에 나갔던 어머니 장례를 치르는 유가족

피골이 상접하다 갈라지고 먼지가 되는 땅

 

녹조는 물고기 떼 이동 경로처럼 빠르게 번져

어민들 한숨에 땅이 꺼진다

바람의 나라에서는 기별도 없다

짬도 모르고 밤낮을 항공기 데시벨로 구애하는 매미

개체 수만 늘다

 

저승사자가 돋보기를 들고 대기하므로

면역력이 약한 노약자는 문밖출입을 삼갈 것

열기의 강도만큼 이제는

예고될 태풍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박동남 시인 / 빈집에 관한 보고서

 

 

산비둘기 앉았다 간 마당이 고요하다

모처럼 햇살 한 자락 담장을 넘어 오자

빈집이 헤실바실 웃었다

 

기왓장 모자 삐뚜름히 쓴 지붕 위로

낮달은 만삭의 배를 내밀고 뚱그적 뚱그적 지나가고

물어물어 찾아온 길은 금세 달아나 버리고

 

바람이 지붕에 풀씨를 뿌려도

말이 없는,

 

산 그림자만 마루 끝에 앉았다 가는

곱사등이 할매가 살았다는

산 아래 빈집

 

-2008 겨울호 '다시올문학' 신인상 당선작

 


 

박동남 시인 / 기타 등등

 

 

보류된 자들은 입 닥치고 잠자코 구석에 찌그러지라 하니

섭섭함을 드러내자면 봇물이 터질 것

먼발치에 서서 주인공들 활동을 부러워하고

불만을 털어놓지 못해 속이 터지지만

이의 없는 것처럼 침묵으로 일관

지난 공로는 휴지조각이다

자리를 뺏기고 폐기될 위기에 놓여보라지

입이 떨어지나

팔리는 날보다 공치는 날이 많아

일에 주리고 돈에 주리고 굶주리는데 이골이 난다

갑도 을도 아니고 정, 병에 속해

바닥을 칠 때마다 살점이 흩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물방울

세월은 처지를 뒤집어 놓는다

밀려나는 힘

내려오는 어둠

그러나 누구는 제2의 도약을 하고

누구는 추락하는 히든카드가 숨어 있을 줄이야

 

-《다시몰문학》 2016년 봄

 

 


 

 

박동남 시인 / 숲 속에는 무슨 일이

 

 

비에 씻겨 울던 날도 그랬다

훑음을 당한 걸로 보아 이건 순전히 바람의 농간이다.

눈 시린 햇살에 기지개를 켠다

키가 웃자란다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 설레는 건 웃음이 피어오르기 때문

시오리까지 날리는 향기

향기를 맡고 날아온 손님들이 웃음 속을 들락 인다.

향기에 취해

맛에 취해

북새통이다.

꽃가루 범벅이다.

탱탱한 결실 붉힐 즈음

와와 같은 소리를 반복하던 문장을 하나 둘 떨군다

들릴 듯 들릴 듯 바스락 이별이다.

환한 옷마저 발아래 벗어두고

어쩌자고 천둥벌거숭인가

계절을 몰고 와 회초리를 고쳐들고 뭇매질을 일삼는 바람

귀신물음 소리에

나도 밤새 물었다

바람은 시치밀 뚝 떼고 자취를 감췄다.

허리를 편다

옹이진 자리가 아프다

간밤에 무채색을 뒤집어쓴 나무들

해가 숲을 지나는 동안

무채색을 업고 빛 그림자 무늬 놀이에 바쁘다

겨울 숲이 유난히 포근한 오늘

 

 


 

 

박동남 시인 / 길

 

 

창문을 열자 소리가 한 무더기 들어온다

외마디를 모아모아 소통하는 참새

귓속말로 속삭이는 바람

익숙한 발걸음 소리

 

뒤섞인 소리를 풀어 해독하듯이

우리는 하루하루 엉킨 실타래를 푼다

오늘은 어떤 매듭이 기다리고 있을까

살아 있는 것들은 저마다 주어진 숙제를 풀기에 바쁘다

다친 일을 풀지 않으면 상황에 엉킨다

 

매듭이 잘린다

통증과 파장 후유증이 천리를 간다

세상을 풀어야할 끝없는 매듭

지름길 빙 돌아가는 길 쉬어 가는 길

늦더라도 우리는 매듭을 풀어야 한다.

 

 


 

 

박동남 시인 / 원숭이 견적을 내다

 

 

건물이 꽤 높네요

가구마다 보일러 연통을 외부에서 꽂아야겠군요

가스보일러 배관을 타고 작업하는데

가구당 바나나 두 개씩만 주시면 되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권리니까요

아차차 간격이 너무 멀어서 저는 안 되겠네요

대신 제가 고릴라 씨와 침팬지 씨를 소개하지요

그들은 팔이 길어 해낼 것입니다

코킹도 잔손질 가지 않게 마무리

사백 다섯 가구 시공하는데 넉넉잡고 삼일이면 족합니다

가구당 바나나 한 개에 사과 한 개 그리고 생명수당으로

하루에 담배 한 갑 추가 되겠습니다

이 불경기에 한 달 버틸 양식은 있어야 하니까요

 

고릴라 씨는 나이지리아 열대산림에서

빛처럼 지나는 줄타기 명수였고요

침팬지 씨는 탕가니카호에서도 재능이 저장된 우두머리였지요

온갖 잡일에 손익을 무렵에는

해도 달도 한 쪽으로 밀어놓고 살았지요

그러나 말이지요. 그들이 가슴을 치며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돌아갈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독수리 눈 같은 눈빛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박동남 시인

전남 광산 출생. <한국문인> 신인상. 빛 소리 문학회 동인.  2006년 경암 백일장 입상. 2008년 《다시 올 문학》으로 등단. 시집 『볼트와 너트』. 현재 〈우리시〉 홍보부장. 국제 팬클럽 회원. 주요작품: <동백꽃지다> <빈집에 관한 보고서> <양변기 편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