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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세환 시인 / 면벽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17.

강세환 시인 / 면벽

 

 

다 큰 장정 같은 청년이

식탁 모서리에 긁히며

식당 식탁 사이를 왔다 갔다 되돌아서곤 했었다

어딘가 탈이 났지만

시퍼렇게 빛나는 청년이다

 

그의 동선을 따라

청년을 나직이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또 흩어진다

이 세상의 모서리란 모서리가 다 뭉툭해질 때까지

 

'저녁은 먹었나?'

 

저 어머니의 목소리가 내 가슴 언저리에 자꾸 부딪친다

자꾸 부딪치다 보면

내 가슴 언저리도 좀 뭉툭해질까

 

 


 

 

강세환 시인 / 앞마당에 그가 머물다 갔다

 

 

그는 피붙이는커녕 무너진 초가 한 칸도 없었다

말년엔 탁발도 끊고

남의 집 헛간에 서당을 차려놓고

끼니를 때웠다는 풍문도 돌았다

그는 헛간 속에도 풍문 속에도

어느 길 위에서도 머물지 않았다

 

그는 옆에 여자를 둔 적이 한 번 있었다

불치병을 앓는 여자구실도 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는 옆에 둔 여자를 잊고

여자도 그를 잊고 살았다

여자를 만나면 여자를 잊고

또 납자(納子)를 만나면 납자를 잊고

 

그는 세월이 또 많이 흘러 뜬구름이 되었다

거울 속에 비친 구름도 상(相)인데

그의 상은 그냥 무상(無相)이었다

구름은 구름이 아니고

거울도 거울이 아니다

그는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은 바람이 되었다

 

허공에 뜬구름도 멀리 멀리 흩어지니

뭇바람이 지나간 것을 알겠더라

헛간도 풍문도 여자도

탁발도 납자도 뜬구름도

그가 머물던 앞마당도

마침내 허공도 뻥뻥 뚫릴 것 같은

 


 

​​강세환 시인 / 무엇 때문에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내가 쓴 시를 읽고

굵게 밑줄까지 긋고 그랬을까

그 시의 행간에 밑줄 그을 때

나의 시는 기억하고 있었을까

내가 쓴 시 첫 행과 마지막 행은

내 힘만으로 쓴 것도 아니다

첫 행과 마지막 행은

그 시의 운명이거나 어긋남

- 시의 운명?

늦은 밤 시 앞에 앉아 있을 때

이게 밤인지 대낮인지

하루가 가고 있는지 하루가 오고 있는지

죽은 시인이 다시 되살아났는지

어디서 시인들이 모여 시를 낭독하는지

저 빗줄기도 귀 밝은 시 한 줄 되는

이것도 그 시의 운명이거나 헷갈림

- 귀 밝은 시?

매일매일 밤은 아침이 되고 아침은 저녁이 되는데

첫 행과 마지막 행은 또 얼마나 멀리 있는지

시인의 마음은 또 얼마나 멀리 있어야 하는지

그 가슴을 맨손바닥으로 쓸어내릴 수도 없고

가슴 쓸어내리다 시까지 쓸어내리면?

다시 시를 가슴에 꼭 껴안고 한없이 깊어지기를!

- 시가 깊어져?

그러다 시의 길도 시인의 길도 끝이 없다

- 시도 힘들어요?

 

 


 

 

강세환 시인 / 우울의 유혹

 

나는 잠시 우울을 먹고 살 것이다

서운할 것도 없다

우울도 시가 되고

힘이 될 것이다

좋은 것만 먹고 살 수 없듯이

우울도 약이 된다

저녁 산책길 밖에는

딱히 갈 곳도 없다

어디를 향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향해

나를 위해

조용히 나의 길을 가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도 단 한 번 웃을 일이 없었다

시를 써도 혼자 읽을 때가 더 많다

시를 쓰는 것이

결코 웃고 울고 하는 일이 아니다

웃고 우는 일을

시가 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우울할 때 나를 지켜보는 것도 시가 된다

나를

화장실 거울 앞에 세워 놓고 바라보는 것도

시가 된다

우울할 때 나를 다독이는 것도 시가 된다

우울하다고 낙실할 것도 아니다

- 전망은 없다 절망도 없다

 

 


 

 

강세환 시인 / 한밤중에 문득

 

 

문득 떠나고 싶다

햇살 좋은 날

당신의 뒷모습을 보았던

삼전동 골목쯤

문득 떠나고 싶다

아침마다

손등으로 눈 비비던

기억의 집

간간이 찬바람 불던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막 등단 소식 듣던

그 이층집

문득 그리고 당신

아무리 견디어도

나 혼자 더 견뎌야 할

또 다른 견딤

 

 


 

 

강세환 시인 / 귤 한 봉지

 

 

늦은 밤 귤 한 봉지 들고 오다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땅에 떨어뜨린 귤 두개

남들이 보기 전에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평정심으로 집에 들어섰다

귤 봉지 식탁에 놓고

안방에 들어가

주머니에 있던 귤을 꺼냈다

주머니에 있던 귤 두 개를 먹고 나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귤 하나 왔다 갔다 하던

평상심

내가 떨어뜨렸다 급히 주워든 이 평상심

귤 두 개에

왔다갔다 하던 뭇 중생의 마음

(즉심즉불)

내가 떨어뜨렸다 얼른 주워든 이 낙심한

잡념

삶이 무거운 신념보다

가벼운 잡념에 기댈 때가 많다

 

-시집 <아침 일곱 시에 쓴 시도 있어요> (경진출판)

 

 


 

강세환 시인

1956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관동대 국어교육과 및 고려대 교육대학원 졸업. 1988년 ≪창작과비평≫ 겨울호를 통해 등단. 시집 ≪다시, 광장에서≫, ≪김종삼을 생각하다≫, ≪시가 되는 순간≫,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면벽≫, ≪우연히 지나가는 것≫, ≪앞마당에 그가 머물다 갔다≫, ≪벚꽃의 침묵≫, ≪상계동 11월 은행나무≫, ≪바닷가 사람들≫, ≪월동추≫ 등. 현재 노원도봉 시집 읽기 시민 모임에서 행사, 기획 등을 총괄하고 있음. 서울 혜성여고 교사로 재직 중.